[시론] 국민이 신뢰하는 과학기술 되려면
새 정부가 석탄화력 퇴출과 4대강 보의 수문 개방에 이어 탈원전을 공식화시켜 버렸다. 대선 기간 중 '문재인 1번가'를 통해 유권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공약이라고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고려하는 선진형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순수한 의도는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새 정부의 공약에 대한 우려도 함부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대선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4대강 사업과 창조경제도 대선 공약이었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도 법치·민주 사회가 요구하는 제도적 절차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고질적인 미세먼지와 녹조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저지르고 보자는 자세는 용납할 수 없다. 화려한 목표와 구호만으로는 국민 안전과 지속가능한 환경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설픈 4대강 사업이 오히려 환경을 악화시켜버린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 해결에 필요한 기술도 확보하고, 실효성과 경제성도 따져봐야 한다.
새 정부의 정책들이 어설프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렵다. 노후 석탄화력의 일시적인 가동 중단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았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비용도 밝히지 못했다. 어차피 본격적으로 농사가 시작되는 6월이 되면 계절적인 요인으로 미세먼지가 줄어든다는 사실도 고려하지 못했다. 결국 한 달 동안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가동을 중단했지만 미세먼지에 대해 우리가 얻은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 수문 개방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수문 개방이 녹조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다. 4대강의 재자연화도 섣부르게 추진하면 또 다른 재앙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계의 입장이 몹시 난처하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새 정부에서 과학기술이 마땅하게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탈원전·탈석탄과 같은 메가톤급 에너지 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인 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돼버렸다. 무작정 중단시켜놓은 원전 공사의 계속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모양이다. 퇴출될 원전 전문가들의 일자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고질적인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수출산업으로까지 성공시켰다는 과학기술계의 원전 기술 개발에 대한 자부심은 공허한 것이다. 오히려 낮은 발전단가와 효율성만 강조하면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고려를 무시한 개발도상국형 기술은 버려야 한다는 인식이 더 지배적이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대량 살상·파괴를 목표로 하는 '북핵'과 구분되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과학기술계가 직면하게 될 상황도 녹녹치 않다. 당연히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던 미래창조과학부는 멀쩡하게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몸집을 더욱 불리게 되었다. 그동안 녹색성장과 창조경제에 시달려왔던 과학기술계가 이제는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4차 산업혁명'의 엉뚱한 짐만 떠안게 될 모양이다.
국민의 80%가 지지하는 새 정부를 탓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학기술이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어왔다는 신화는 오래 전에 끝났다. GDP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에도 불구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과학기술을 이 지경으로 무너지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뼈를 깎는 마음으로 성찰하고, 반성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언제나 지고지순한 것이고, 과학자는 어떤 경우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환상도 버려야 한다. 과학자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해주면 당장이라도 세계 최고의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노벨상을 싹쓸이 해올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정부의 알량한 연구개발비나 받아내자는 패거리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 국민이 신뢰하는 과학기술을 만들기 위한 어렵고 힘든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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