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나 사는 모습보면 누가 애국하겠나"..독립운동가 유족의 恨

이재우 2012. 8. 1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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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 및 처가 모두 47명 독립운동서훈 받은 이항증 선생

【서울=뉴시스】이재우 기자 = "내가 어렸을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했어. 모친께서 한(恨)이 되셨는지 90살때 쓴 회고록에 적어두셨더라고. 그 많던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했는데 먹을 게 없어서 굶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셨던 게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총리)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년) 선생의 증손 이항증(73)씨는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독립유공자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단한 삶을 이같이 회고했다.

석주 선생은 경남 안동의 거유(巨儒)로 국권침탈 직후인 1911년 일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했다. 경학사(耕學社)를 세워 간도에 벼농사를 보급했고 가산을 모두 정리해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 형제 등과 신흥무관학관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2100여명의 졸업생은 항일무장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주역이 됐다. 석주 선생은 1932년 '해방이 되기 전까지는 유해를 결코 조선으로 안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만주에서 숨졌다. 1996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석주 선생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아들 준형(1875~1942), 손자 병화(1906~1952) 등도 독립운동을 했다. 일가만 9명, 처가를 포함해 47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다. 일가가 독립운동에 매진한 셈이다.

이씨는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일가 전체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고 떠올렸다. 가난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적 냉대, 이념 탓에 연좌제 등 독립운동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하나하나 꼬집었다.

"그 많던 재산 다 독립운동하는 데 썼지. 애들을 가르쳐야 하는 데 돈이 없잖아. 학교에서 쫓겨 오기 일쑤였어. 그리고 1950~1960년대는 독립운동했던 사람들을 죄인 다루듯이 했어. 빨갱이(사회주의자)와 동급이었지. 독립운동하셨던 어른 중 한 분이 북을 택하셨는데 연좌제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독립운동하셨지만 이념 때문에 역사에서 사라진 분들이 많아. 구천에서 그분들 혼이 떠돌고 있을 거야."

그나마 이씨는 자신을 '기득권'이라고 칭했다. 서훈을 인정받아 연금을 받는다는 이유에서다.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이 1만1000여명이야. 적 치하에서 36년을 독립운동했는데 그것밖에 안 될까. 3·1 운동때 만세 부른 사람만 4만명이야. 서훈이 늦어져 기록이 다 사라진 거지."

그는 정부 보훈정책에 문제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인터뷰 중 보훈정책 관련 기사철을 가져와 형광펜으로 그어가며 문제점을 짚어갔다. 보훈과 안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꼬집었다. 국가가 기억해주지 않는데 누가 목숨을 내놓을 것이냐고 되묻기도 했다.

"김양 국가보훈처장이 2009년 국가유공자 고용명령제를 도입하겠다고 했더니 이명박 대통령이 '보훈 가족이라는 것 하나로 기업에 의무채용을 강요해선 안된다'고 했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쳤어. 그런데 손해를 봐. 어렵게 살아. 그걸 보고 누가 목숨을 바치려고 할까. 말로 하는 건 밥 한 그릇보다 못하다고 봐. 보훈 가족이 밥 못 먹고 학교 교육 못 받겠는 상황은 안 만들어야지."

이씨는 보훈은 일시적인 깜짝쇼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2009년 정부는 석주 선생 등 일제 치하 호적 등재를 거부한 독립유공자들에게 가족관계기록부를 만들어줬다고 대폭 홍보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지루한 인지청구 소송을 해야 했다고 이씨는 지적했다.

"정부에서 가족관계기록부를 만들어준다길래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 그런데 공문이 왔어. 호적을 정리하기 위해서 인지청구 소송을 하라는 거야. 대행해주거나 비용을 지원해주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안 해주더라. 홍보만 하곤 나머지는 다 유족에게 자기 돈 들여서 하라고 떠넘긴 거야."

이씨는 그간 무수한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고 했다. 이유는 이렇다.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하겠나. 잘 사는 사람 데려다 놔야 애국하지. 나라 위하니까 국가가 보호해주더라. 사람들이 그거 보고 겁 없이 전쟁 나면 나도 나가겠다. 이렇게 생각하게 해야지."

ironn108@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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