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1억 올려달라네요".. 서민들 잠이 안온다

정순우 기자 2020. 7. 16.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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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고된 전세대란] 6·17, 7·10대책 나오자 급등세

서울 중랑구에 사는 주부 박모(43)씨는 집 근처 공인중개업소를 지날 때마다 한숨을 쉰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전세 호가(呼價)가 최근 날마다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약이 3개월 남짓 남았지만 집주인이 5000만원 이상 보증금을 올려 달라고 할 게 뻔하다. 그는 "지금 수입으로는 생활비 대기도 빠듯한데 아이를 전학시키며 어디로 이사 가야 할지 집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오고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라고 했다.

정부가 최근 6·17 대책, 7·10 대책을 잇달아 내놓으며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고, 여당이 '임대차 3법'을 이달 내에 처리하겠다고 밝히자, 서울 강남·강북 가릴 것 없이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다. 집값 급등보다 전셋값 급등이 서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크다. 전셋값이 오르면 목돈을 마련하거나 집을 옮겨야 해 주거 불안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서울 송파구의 한 공인중개업소 게시판에 아파트 매매 및 전·월세 매물 정보가 붙어 있다. 최근 정부가 6·17, 7·10 등 두 번의 부동산 대책을 낸 후 서울 인기 지역 아파트 전셋값이 급등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서울 은평구의 30평대 아파트에 보증금 3억9000만원 전세를 사는 이모(39)씨는 최근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5억원으로 올려 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지난달 초 3000만원을 올려 달라 했다가 6·17 대책이 나온 후 8000만원을 추가로 올려 달라는 것이다. 이씨는 "집주인도 전세 사는데 자기도 보증금을 올려줘야 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며 "외곽으로 나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성동구와 강동구의 30평형대 신축 아파트들은 최근 전세 호가가 10억원까지 올랐다. 교통과 학군이 좋은 강남·송파구 일대 전세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KB국민은행 집계에 따르면 지난주(이달 6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가격은 0.29% 올라, 2015년 3월 다섯째 주(0.32%) 이후 5년 4개월 만에 가장 많이 올랐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유동성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규제 일변도 정책을 펴 온 결과 서울 집값이 급등했고, 시차를 두고 전셋값도 오르고 있다"며 "예고됐던 전세 대란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와 여당은 전셋값 인상률을 제한하고 임차인에게 일정 횟수 이상 계약 갱신 권리를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현재 임대차 보호법을 개정 중이다. 하지만 바뀐 법이 시행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동안 전셋값은 오를 가능성이 높다.

◇전셋값 급등에 임차인 '절규'

/조선일보

강동구의 한 20평대 아파트에 사는 김모(65)씨는 집주인과 전세금을 6000만원 올리기로 지난달 합의했다. 하지만 이달 7·10 대책이 나온 후 집주인이 "주변 전셋값이 갑자기 더 올랐다. 2000만원을 더 올려주거나 방을 빼달라"고 해 날마다 밤잠을 설치고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김씨는 자녀들이 보태주는 생활비 외에는 소득이 없다. 그는 "2년 새 8000만원이나 올려 달라는 집주인을 원망해야 하는지, 이렇게 만든 국가를 원망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송파구 잠실동 B아파트 전용 84㎡는 두 달 전만 해도 9억원 정도에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10억원대 초반부터 11억원대로 호가가 치솟았다. 강남구 대치동에서도 전세 매물이 줄어들고 호가가 오르고 있다.

이 같은 서울 전셋값 급등은 규제 일변도의 정부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재건축·재개발 규제가 대표적이다. 재건축·재개발이 막히면 전셋집으로 쓰일 새 아파트 입주 물량이 줄어든다.

부동산 정보 업체 '부동산114' 집계에 따르면 올해 4만8051가구인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내년이면 2만5021가구로 47%가량 줄어든다. 정부가 이달 말부터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도 시행할 예정이어서 앞으로도 공급 절벽은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신규 공급이 줄어든다면 기존 주택 중 전세로 나오는 물량이 부족분을 메워줘야 수요·공급의 균형이 유지된다. 하지만 기존 주택과 관련된 정책도 대체로 이런 시장 원리에 역행한다. 정부는 2018년 9·13 대책과 지난해 12·16 대책을 통해 1주택자 양도소득세 공제에 필요한 의무 거주 요건을 강화하고 있다. 6·17 대책에 포함된 토지거래허가구역 제도도 전셋집 감소를 유발하는 규제다.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 투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세입자를 내보내야 집을 처분할 수 있다. 강남·송파구의 삼성·청담·대치·잠실 등 4동(洞)이 규제 대상인데, 모두 학군과 교통이 좋아 전세 수요가 많은 지역이다.

◇월세·반(半)전세 늘어날 듯

정부는 우리나라의 보유세가 해외 선진국에 비해 낮다는 이유로 종부세율·공시가격 인상 등 사실상 증세 정책을 펴고 있다. 그 결과 집 가진 사람들의 보유세 부담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문제는 전셋집이 부족한 상황에서 보유세가 늘어나면 집주인이 그 부담을 세입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전가하려 한다는 것이다. 전세금을 높이거나 반(半)전세, 월세로 전환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세입자들은 이에 저항해야 하지만, 전세 수요가 많은 시점에 공급이 줄어드는 효과가 나는 정책을 쏟아냄으로써 세입자가 저항할 힘이 더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터넷 부동산 카페 등에는 '이번 생에는 집도 못 사고 전세도 틀렸다'는 등 자조(自嘲) 섞인 반응이 나온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는 "다주택자 세금 강화와 임대사업자 폐지, 임대차 3법 등의 규제는 전세 공급의 근간인 민간 임대 시장을 몰살시킬 수 있다"며 "결과적으로 무주택자가 가장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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