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양치기?' '구닥다리?' 질타..높아지는 한은의 무력감 어쩌나
중단됐던 국정감사가 재개된 4일 오전, 한국은행 15층 회의실에서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한국은행에 대한 국정감사가 시작됐다. 미르재단이나 K스포츠재단 문제 등 정치현안을 놓고 으르렁거린 다른 상임위원회와 달리, 한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한계 상황에 달한 가계 부채와, 경기 침체, 저금리와 환율 문제 등 경제 현안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다.
어려운 경제정책과 금융통화 정책에 대한 질의 가운데 눈에 띈 것은 한국은행이 실시한 경제전망의 오류 문제다. 경제성장률과 물가 등 한은의 전망치가 실제와 계속 어긋나는데 도대체 원인이 무엇이냐는 것. 박사급 경제전문가가 120명이 넘는데 어떻게 번번이 예측이 빗나가느냐는 질의였다.
한국은행이 새누리당 박명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한은의 성장률 전망치와 실제 성장률은 1.7%P나 차이가 났다. 2012년부터 경제전망치가 분기별로 작성되고, 2013년에는 당해연도 1월 성장률 전망치를 내놓으면서 전망치가 맞아 들어가는 듯 했지만, 2014년부터는 다시 오차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현미 의원과 박광온 의원 등은 지속적인 금리인하로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치를 나타내고 있는데도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가계부채는 늘고 부동산 가격은 올라 서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저금리 정책이 부동산 부양정책이 됐다면서 양극화를 심화하는 금리인하 정책을 바꿀 생각은 없는지 추궁했다.
국민의당 김성식 의원은 한국은행이 금리를 낮추면서 LTV(부동산가격대비 대출비율)나 DTI(소득대비부채비율) 정책으로 효과를 발휘하던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이 무력화됐다면서 정부의 압력으로 금리를 내려 부동산 정책이 무력화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이혜훈 새누리당 의원은 “7명의 금융통화위원 가운데 KDI 출신이 어떻게 3명이나 되느냐"며 "이것이 외압의 증거가 아니냐, 한은의 독립성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한은 총재가 이런 것도 견제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모든 문제가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실시한 금리인하 정책, 이른바 ‘초이노믹스’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질의도 이어졌다.
의원들의 질의에 진땀을 흘리던 한은 총재는 원론적인 답변을 이어갔다. 이주열 총재는 금리인하의 소득증대 효과가 미흡했다고 인정하면서 물가와 금융안정 위험, 거시경제 요인 등을 고려해 국가경제에 가장 순기능이 큰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겠다고 답변했다. 물가전망이 자꾸 틀리는 데 대해서는 국제유가가 예상 외로 하락했고, 예상하지 못한 올 여름 정부의 전기요금 인하로 물가가 예상 외로 하락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의원들의 질의에 대한 한은 총재의 답변은 이래저래 궁색하기 그지없었다. 물가와 금융안정이라는 한은의 고유한 정책 목표 외에 고용안정에 기여할 것까지 요구되고 있지만, 한은의 성과물을 대표하는 각종 지표는 한은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이 추구하는 소비자 물가 수준은 2%로, 한은 총재는 물가수준이 여기에서 0.5%P 이상 6개월이나 벗어나자 지난 7월 대국민 설명회를 개최했고, 다시 3개월이 지난 이달에 또 대국민 설명회를 열어야 할 판이다.
이렇게 물가 수준이 목표치보다 낮다면 현재 연 1.25%인 기준금리를 더 낮춰야 하지만 가계부채가 늘어날 수 있다는 걱정에 진퇴양난이다. 올 들어 지난달까지 물가상승률은 0.4%, 기준금리 1.25%에서 물가 상승률을 뺀 실질금리는 0.85%로, 한은은 적극적인 경기부양 정책을 쓰는 미국이나 유럽과 달리 경기 억제 정책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이주열 총재는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통화금융 정책 외에 재정정책이 있다면서도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내년 정부 예산은 재정의 건전성 유지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라고 밝혔다. 경기진작과 재정안정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경제금융당국의 발언은 허언이 된 셈이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세계 경제가 저금리, 디플레이션으로 가고 있는데, 한은이 구시대적인 경제예측 모델을 사용해 경제전망을 잘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서강대학교 경제대학원 김영익 교수는 “과거 데이터를 토대로 경제전망을 하면 안 되는데, 한은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인식하고도 외면하고 있는 것 같다. 기준금리가 3년 만기 국채수익률보다도 낮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금리정책이 선제적이 아니라 후행적이었다”고 밝혔다.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김경원 교수는 “한국은행의 전망치는 희망사항을 반영한 것 같다. 금리를 내리면 자산 가격이 올라 소비가 늘고, 저축을 해 쥐꼬리 이자를 받느니 차라리 소비를 하겠다는 심리가 나타난다는 게 전통적인 학설이지만,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금리를 내리니 소비 여력이 있는 고령 자산가들이 오히려 소비를 줄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금융통화정책이 무력화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은의 심리가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 고문은 최근 저서 “중앙은행의 잔치는 끝났다(The Only Game in Town)”에서 중앙은행이 나서 금리를 낮추고 총수요를 진작하는 통화금융정책은 약발을 다했다고 진단하고, 이제 치밀한 구조개혁을 통해 효율과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혁신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기술을 활용하고, 교육시스템의 개혁, 인프라 개발, 성장을 저해하는 재정 왜곡 시정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갖춘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이 조금만 늘어도 소비가 바로 늘어날 수 있는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부담이 좀 늘어도 소비 여력에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 부유층의 부담 확대, 비과세나 세금 감면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세제와 재정정책을 펴서 정부정책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하고, 채무 재조정 등을 통해 과도한 부채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해법도 제시했다.
'사람은 역능감(Sense of Ability)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초저금리와 재정 집행에도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부채만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국은행도 정부도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도입된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는 연금의 이자수익을 줄여 오히려 노후대책을 위협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정치적 책임 논란에서 벗어나 모두 합심해 역능감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일일 것이다.
김용철 기자yc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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