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 포커스] 산으로 가는 금융 정책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9일 "월세대출 종합 개선방안을 강구해달라"고 했다. 말은 개선방안이지만 속내는 월세대출을 늘리라는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날 국무회의에서 전월세난에 적극적인 조치를 해달라고 한 데 따른 화답의 성격이다. 전세가 급등하면 전세대출, 월세가 모자라면 월세대출 확대로 대응하는 식이다. 하지만 정작 일선 금융회사들은 이번에도 썩 달갑지 않다. 걸핏하면 '금융'을 외치는 이른바 '금융 만능주의'가 현 정부 들어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전월세와 각종 서민 문제를 금융으로 풀려고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출 확대처럼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금융에 기댄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금융은 진통제에 불과하고 시장을 왜곡해 더 큰 부작용만 낳는다고 우려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만능열쇠 '금융'=
업계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각종 서민문제 해결에 금융을 동원한다고 지적한다. 이명박 정부에서도 서민 전용대출 상품을 만드는 등 금융 공급을 늘렸지만 최근에는 다중채무자에서부터 하우스푸어ㆍ렌트푸어, 전월세 대책까지 금융지원 방안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채무자들의 빚을 최대 50%까지 탕감해주는 국민행복기금을 실시했다.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서민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연 20%대 이상의 고금리 대출을 저금리로 갈아타게 해주는 사업도 대상을 대폭 확대했다.
서민 지원을 위한 채무조정도 늘리고 있다. 금융 당국은 최근 누적 연체일수가 30일 미만이라도 연체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다음달부터는 서울보증보험과 주택금융공사의 소액임차보증금 보험 및 보증상품도 프리워크워크아웃 대상이 된다.
전셋값이 급증하자 전세대출 한도도 크게 확대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주택금융공사의 전세대출 보증한도를 기존의 1억5,000만원에서 2억원으로 올리고 소득 대비 보증한도도 연소득의 최대 3배에서 4배로 늘렸다. 이에 맞춰 은행들도 전세대출 한도를 이번주부터 높이고 있다. 하우스푸어를 위한 '목돈 안 드는 전세대출'도 속속 출시될 예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중은행장은 "당장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대출을 늘려주고 빚을 줄여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가장 편할 것"이라며 "하지만 사회문제 해결에 금융을 자꾸 이용하다 보면 시장원리가 무너지고 부작용이 더 커진다"고 했다.
◇금융, 진통제에 불과=
전문가들은 정부가 금융에 의존하기보다는 기업 투자와 일자리를 늘려 가계소득을 증가시키는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당장 전월세가 너무 올라 서민들이 이를 메우려다 신용경색이 오는 일은 막아야겠지만 정부도 인내심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는 얘기다.
업계에서는 금융이 각종 서민문제 해결에 동원되면서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고 본다. 국민행복기금의 저금리 전환사업의 경우 최근 들어 신청자가 급증하고 있다. 7월 신청 건수는 6,055건으로 월별 수치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특히 신용등급 1~5등급인 사람들도 한 달에 200여명씩 신청하고 있다. 대상을 지나치게 확대하면서 신용등급이 좋은 이들까지 혜택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은행 등의 채무조정 대상을 늘리고 대대적인 빚 탕감을 해주면서 대부업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계속 올라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월세 대출 확대는 가계부채만 더 늘리는 꼴이라는 지적도 많다. 정부가 국민들에게 빚을 내서 세를 살라고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지난 3월 말 현재 가계신용 규모는 약 961조6,000억원으로 올해 중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출 가능금액만 자꾸 늘려주는 것은 전형적인 땜질 처방이라는 얘기다.
전월세 대출금액이 많아지면 되레 전월세가 그만큼 더 상승하는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해석도 있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전세가 줄고 월세가 증가하는 것은 저금리가 주요 이유이기 때문에 금융보다는 소형 주택공급을 더 확대하고 부동산시장을 바로잡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실제 전세를 월세로 바꾼 데 따른 월세 비용을 연이율로 따져보면 약 6% 수준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 금융공급을 확대하면 훗날 더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금융권의 고위관계자는 "금융공급 확대는 진통제에 불과하다"고 했다. 지금 대출을 더 늘렸다가 경기회복이 이뤄지지 않으면 연체율이 크게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도 무분별한 모기지 확대가 주요 원인이었다.
금융 당국의 고위관계자는 "대출공급 확대 같은 정책은 일시적인 효과밖에 없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경기회복이 이뤄질 때까지 버티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영필기자 susopa@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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