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 경제살리기 야전사령탑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
9ㆍ3 개각과 관련해 하마평이 무성하던 지난 8월 10일 여의도 D음식점. 당시 기자는 임태희 의원(노동부 장관 후보자)과 점심을 하면서 '최경환 의원 지식경제부 장관설'에 대해 물었다.
당시 임 의원은 최 의원과 함께 지경부 장관 후보로 하마평이 나돌고 있었다. 임 의원은 잠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이런 즉답을 했다. "최 의원이 지경부 장관으로 간다면 그건 친이ㆍ친박 간 화합 차원이 아니라 그의 실력 때문일 것"이라고.
최경환 장관 후보자는 지난 17일 국회 지식경제위에서 인사청문 경과서를 채택하면서 사실상 지식경제부 장관 임무 수행에 들어감에 따라 후보자 명칭은 생략한다.
최 장관이 한나라당 수석정조위원장으로 활약하던 지난해 말 기자는 최 장관에게 "친박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에서 신뢰를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질문을 던졌다. 최 장관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경제살리기 분과 간사를 맡았는데, 주변 사람들 말을 종합해보니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나에 대해 '맡은 일은 잘하는 놈이다'는 평가를 내린 모양"이라고 답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번 개각에서 이 대통령에게 낙점을 받았다.
최 장관은 한나라당에서 늘 '친박계 정책통'으로 불렸다. 여야를 막론하고 '박근혜 전 대표가 대권으로 가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이처럼 그는 '친박 핵심 인력'임에도 친이계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지난 5월 한나라당 원내대표ㆍ정책위의장 경선에 황우여 의원과 함께 다소 뒤늦게 나갔다가 참패해 체면을 구겼듯이 자기 주관이 약하다는 평도 있다.
◆ 월급 안 아까운 공무원
= 최 장관이 만든 대표적인 정책으로 '아파트 채권입찰제'가 있다. 그가 경제기획원에 재직할 당시 만든 것인데, 민영 아파트 분양 시 분양 예정가격이 인근 아파트 가격과 차이가 크게 발생할 때 그 차액을 채권으로 흡수하는 제도다.
1980년대 초반 주택청약통장 프리미엄이 최고급 아파트 한 채 가격 수준으로까지 치솟는 상황이 발생하자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 채권으로 흡수된 자금은 지금도 서민 주택 마련에 사용되고 있다.
그는 대외경제조정실에 근무할 때인 1991년 남북 간 거래 시 결제수단, 북한 근로자 임금 계산법 등이 포함된 남북기본합의서 경제 분야 초안도 만들었다.
기획예산처 시절에는 500억원 이상 소요되는 사업에 반드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도록 해 국가예산 절감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최 장관이 공무원 재직 시절 동료들에게서 "정부에서 평생 월급을 받아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다.
그는 국제금융기구인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수석이코노미스트로 일하면서 동유럽권 경제개발 전략도 맡았고, KT 민영화 초석을 닦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 멀리 내다본 역동적인 삶
= 최 장관은 주변 사람들에게서 '역동적이다'는 평가도 많이 받는다. 공무원 재직 중 두 번에 걸쳐 '공무원답지 않은' 과감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미국 유학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최 장관은 1987년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과정에 입학한다. 여기서 주목해서 볼 것은 그가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서 연수생 신분으로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공무원 연수생들은 대부분 석사학위를 받는 2년 기간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와 업무에 복귀했다. 박사과정까지 마치려면 추가로 2년 휴직을 신청해야 하는데, 연공서열이 중요한 공무원 조직에서 2년을 더 외부에 머무른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지만 최 장관은 휴직 신청 후 미국에 더 머무르며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유학생활을 함께 했던 조전혁 한나라당 의원은 그의 장기적인 안목을 높이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많은 경제관료들이 있지만 탄탄한 이론과 실무를 겸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 장관은 눈앞에 보이는 '빠른 승진'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다 나은 '전문가'가 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기에 위스콘신대에서 유학했던 김진표 민주당 의원도 "학업에 굉장히 열심이었고 뛰어난 사람"이라며 "박근혜 전 대표가 국가 지도자로 서려면 최 장관 같은 사람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관계에서 승승장구하던 최 장관은 1999년 공직을 떠나 한국경제신문으로 자리를 옮겨 언론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모 부처 국장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한다. 지인들은 그에게 언론사 논설위원 자리보다는 국장 승진을 추천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모험을 택했다. 언론계 적응은 순조로웠다. 경제기획원 시절 인연이 있는 김인호 전 대통령 경제수석은 "솔직히 그가 그때까지 몸담았던 공직과는 전혀 다른 풍토와 환경 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면서 위치를 찾아갈 것인지 염려했던 것이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염려가 전적으로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했다.
최 장관은 사석에서 종종 언론계 경험을 말한다. "기사를 쓰고 토론하며, 세계 석학을 두루 만나 대담을 나누는 가운데 탁상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생생한 현장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최 장관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TV와 라디오 방송 대담ㆍ토론회 등에 100여 회 출연했다. 경제전문가로서 브랜드 가치를 확고히 심은 셈이다.
◆ 경제를 위해 정치인으로 변신
= 최 장관은 2002년 영역을 다시 정계로 넓힌다. 그해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상근 경제특보를 맡으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
'경제를 바꾸러 정치에 나선다'는 모토를 걸고 17대 총선 경산ㆍ청도에 출마해 국회에 입성한 그는 제4정책조정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초선 의원으로서 맹활약했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 수도이전문제 특위 간사, 국회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위헌 결정 후속대책 및 지역균형발전 특위 한나라당 간사를 맡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대표최고위원으로 한나라당을 이끌고 있을 때다. 박 전 대표와는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됐다.
지난해 18대 총선에선 같은 지역구에서 전국 최다표로 당선됐다. 이후 당 수석정책조정위원장, 경제위기극복 종합상황실장 등으로 근무하며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한 'MB노믹스 레일'을 까는 데 한몫했다. 종합부동산세 개정,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한시적 폐지가 대표적이다.
그는 지경부 장관으로서 어떤 구상을 갖고 있을까. 이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주로 선진국을 캐치업(catch-up) 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발전시켜왔다. 이제는 이를 돌파해야 한다. 기술혁신, 새로운 성장동력 육성 등 새 발전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소기업 육성 △연구개발(R&D) 지원체제 혁신과 효율성 강화 △소프트웨어(SW) 산업 육성 △부품소재 원천기술 확보 △자원개발 투자재원 확충과 실효성 있는 자원외교 추진 등 정책을 제안했다.
▶▶ He is…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자는 한나라당 내 대표적인 '정책통'이다.
'친박(박근혜)계'로 분류되지만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 경제살리기위원회 총괄간사로 활동하는 등 계파를 떠나 인정받고 있다.
경북 경산 출신으로 부친의 강요로 한때 농업에 종사할 뻔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세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후 재학 중 행정고시에 합격해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등을 거치며 정통 경제관료로 활약했다. 이후 언론인으로 변신해 한국경제신문에서 논설위원, 편집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이후 17대 총선에서 경북 경산ㆍ청도에서 당선돼 국회에 입성했다.
17대 국회에서부터 그는 한나라당 정책위 제4정책조정위원장, 수도이전문제 특별위원회 간사, 농어촌살리기 특별위원회 위원, 공공부문 특별위원회 위원, 조세개혁특별위원회 위원 등을 맡으며 정책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수도 이전과 관련해 청와대ㆍ국회ㆍ대법원은 이전이 불가하다는 헌법재판소 판결을 유도해 주목받았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 캠프 종합상황실장을 맡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후에는 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위 간사를 역임했다.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후 한나라당 수석정조위원장, 한나라당 경제위기극복 종합상황실장,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등을 역임했다.
△1955년 경북 경산 출생 △1975년 대구고 졸업△1979년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1991년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1978년 행정고시 합격(22회) △1994년 재정경제원 국고국 서기관 △1995년 유럽부흥개발은행 선임연구원 △1998년 기획예산처 법무담당관 △1999년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2002년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상근 경제특보 △2004년 17대 국회의원 △2008년 18대 국회의원 △2008년 국회 기획재정위 간사, 조세소위원장
[민석기 기자 / 장재혁 기자 / 사진 =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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