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인력거꾼 사라졌지만.. 四大門 안엔 고단한 '김첨지의 삶' 여전

기자 2017. 1. 20. 15: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인력거꾼은 사라졌으나 남대문 시장 일대에는 아직도 카트로 물건을 나르는 모습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는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네 명의 손님과 함께 동소문, 전차 정류장, 남대문정거장, 창경원 등 서울 시내를 두루 누볐다. 곽성호 기자 tray92@
1920년대 서울 시내 남대문 주변 거리 모습.

(63)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 배경… 서울 도심

현진건의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조선의 얼굴’(글벗집, 1926)인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진건은 식민지 조선의 구체적인 삶과 현실을 누구보다도 핍진하게 담아냄으로써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을 놓은 기념비적인 작가다.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 남편과 구여성인 아내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빈처’(개벽, 1921.1.)를 비롯한 명작이 여러 편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운수 좋은 날’(개벽, 1924.6.)은 당대 하층민의 생활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절묘한 아이러니적 기법으로 인해 전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인력거꾼이라는 주인공 김첨지의 직업으로 인해 1920년대 중반 서울의 여러 공간이 비교적 풍부하게 드러나 있다. 김첨지는 네 명의 손님을 만나 자연스럽게 서울 시내를 편력하게 된다. 그 여로는 동소문 근처의 집→전차 정류장→동광학교→남대문정거장→인사동→창경원→동소문 근처의 집으로 정리할 수 있으며, 그 여러 공간은 크게 ‘김첨지의 집’과 ‘거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김첨지가 살고 있는 동소문 근처의 집(그래봐야 안과 뚝 덜어진 행랑방 한 칸)은 급속하게 식민화(근대화)되어 가는 시대로부터 소외된 김첨지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다. “문안에(거기도 문밖은 아니지만) 들어간답시는 앞집 마나님”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첨지의 집은 동소문 안에 있으면서도 시내로 나가는 것이 ‘성문 안에 들어간다’고 표현될 만큼, 성문 밖과 성문 안의 경계에 위치한 곳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중심에 살 여유가 없어 주변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지만 일거리가 시내에 있기에 아예 서울을 떠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울의 경계 지점에 거처를 마련할 수밖에 없는데, 달동네가 수직적 차원에서의 경계지점이라면 김첨지의 집은 수평적 차원에서의 경계지점인 것이다.

현진건은 김첨지의 집을 냉혹할 정도로 잔인하게 묘파한다. 그 집은 ‘오라질 년’이나 ‘난장 맞을 년’ 등의 욕설과 병자의 뺨을 때리거나 다리를 몹시 차는 등의 폭력이 공존하는 곳으로서, 여기에 어설픈 감상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동시에 그곳은 가난과 더불어 “병이란 놈에게 약을 주어 보내면 재미를 붙여서 자꾸 온다는 자기의 신조(信條)”가 힘을 발휘하는 무지몽매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동소문 근처에 있는 김첨지의 집은 시대로부터 소외된 하층민들의 어두운 삶을 드러내는 전형적 공간이다.

이에 반해 김첨지가 인력거를 끌고 지나는 전차 정류장, 동광학교, 남대문정거장, 인사동은 모두 근대화(식민화)되어 가는 1920년대 서울의 외양을 대표하는 공간들이다. 일제는 1920년대 들어 서울을 식민지 근대 도시로 변모시키는 데 열을 올렸으며, 그 결과 조선총독부 청사(1925), 경성신사(1925), 경성역사(1925), 경성부 청사(1925) 등의 거대한 석조건물이 위압적으로 서울의 곳곳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곧 경성역사가 완공될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인사동 역시 청진동 다옥정 등과 더불어 천향원이라는 유명 요릿집을 비롯한 기생집, 권번 등이 즐비한 서울의 대표적 유흥공간이었다.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서울 거리를 달리는 김첨지의 마음은 ‘돈 벌 욕망’과 집에 두고 온 ‘병자에 대한 염려’, 달리 표현하자면 ‘집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김첨지는 눈도 바로 뜨지 못하는 병자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멀어지는 것에 마음이 켕겨 하며, 그의 귓가에는 “오늘은 나가지 말아요. 내가 이렇게 아픈데!”라는 병자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아 갑자기 길 한복판에 엉거주춤 멈춰 서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거금을 지불할 손님을 생각하며 “얼음을 지쳐 나가는 스케이트 모양”으로 “거의 나는 듯” 남대문정거장을 향해 달려가기도 한다.

운수 좋은 날에서 창경원 앞은 ‘집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치열하게 맞부딪치는 공간이다. 우연히 만난 친구 치삼이와 선술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김첨지는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누구든지 나를 좀 잡아다고, 구해다고 하는 듯”한 모습으로 사면을 두리번두리번 머뭇거린다. 치삼이와 선술집에 들어간 후에는 자학적으로 술을 과하게 마신다. 이것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불행과 맞닥뜨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순간도 김첨지는 돈과 권력이 주인 노릇하는 거리의 논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김첨지는 기어이 일 원어치나 술을 먹으며, “이 원수엣 돈! 이 육시를 할 돈!”이라 외치며 그 어렵게 번 돈을 내던지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죽어가는 아내를 외면하고 거리를 내달리며 돈을 버는 데 신바람을 냈던 자신을 자학적으로 응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치열한 승부가 벌어지는 장소로 창경원이 선택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아마도 창경원이 몰락해가는 조선 혹은 몰락해가는 김첨지와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는 지속적인 파괴를 통해 조선의 얼이 담긴 서울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식민지 도시로 변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을 대표하던 건축물들은 속절없이 사라져 갔으며, 창경원이야말로 그러한 상처받은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 본래 창경원은 조선 시대 다섯 개의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하나였으나, 일제는 1909년부터 그 내부에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며 명칭도 창경원으로 격하된다. 운수 좋은 날이 발표되던 1924년에는 밤 벚꽃놀이가 시작되어 창경원은 과거의 위엄은 사라진 채 말 그대로 유원지로 전락했다.

‘집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자못 치열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은,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근 열흘 동안 돈 구경도 못한 김첨지가 앞집 마나님,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 귀경하려는 동광학교 학생, 전차를 놓친 손님을 연달아 태우며 무려 2원 90전을 번 날은 분명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세든 행랑채의 한 달 집세가 1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하루 동안 번 돈이 얼마나 큰 돈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운수 좋은 날은 김첨지 생애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인력거꾼이라는 직업은 당시에 이미 사양직종이었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인이 서울에 들여온 인력거는 오랫동안 서울의 교통수단 역할을 했지만, 1920년대는 이미 전차가 서울 시내 대중교통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첨지가 태우는 거의 모든 승객이 전차와 관련되어 있는 것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앞집 마나님이 인력거를 이용한 것은 전찻길까지 가기 위해서이고, 교원인 듯한 양복쟁이도 전차 정류장에서 만난 것이며, 마지막 손님이 인력거를 탄 이유도 전차를 놓쳤기 때문이다. 전차 이외에도 1912년부터 서울 시내에서 운행되기 시작한 임대승용차(택시)도 인력거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김첨지는 질병과 철빈과 폭력과 미신이 가득한 동소문 근처의 집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것은 결국 김첨지가 집으로 되돌아오는 이 작품의 원점회귀형 여로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결국 현진건은 섣부른 희망 대신 체념을 선택한 것이고, 이러한 선택은 현진건이 그 집을 벗어날 방법(이념)까지는 아직 숙고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당시 인력거꾼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수입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동광학교(東光學校許可(동아일보, 1922.8.8.)라는 기사에 따르면 숭일동, 즉 현재의 명륜1가에 위치한 것을 알 수 있음)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 손님을 태워다 주고 난 후, 김첨지는 “노동으로 하여 흐른 땀이 식어지자 굶주린 창자에서, 물 흐르는 옷에서 어슬어슬 한기가 솟아나기 비롯하매 일 원 오십 전이란 돈이 얼마나 괴치 않고 괴로운 것인 줄 절절히 느끼었다. 정거장을 떠나가는 그의 발길은 힘 하나 없었다. 온몸이 옹송그려지며 당장 그 자리에 엎어져 못 일어날 것 같았다.”(148면)라고 묘사된다. 1920년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도로가 정비된 오늘날을 기준으로 삼아도 하루 동안 김첨지가 인력거로 이동한 거리는 무려 15㎞가 넘었으니, 김첨지가 느꼈을 피곤함은 매우 심각했을 것이다.

현진건은 이후 ‘동정’(조선의 얼굴, 1926)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력거꾼의 고단한 삶을 다시 한 번 다룬다. 이 작품에는 추운 겨울날 비탈길을 달리다가 곤두박질해 인력거까지 망가져 어쩔 줄 몰라 하는 인력거꾼이 등장한다. 현진건에게 인력거꾼은 몸뚱이 하나에 의지해 살아가던 당대의 민초들을 대표하는 직종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 주요섭도 ‘인력거꾼’(개벽, 1925.4.)이라는 소설을 통해 인력거꾼의 비참한 삶을 다루고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의 인력거꾼인 아찡은 인력거꾼 노릇을 한 지 8년 만에 죽는다. 공보국에서 나온 직원은 ‘과도한 달음질’로 인해 인력거를 끈 지 8년에서 10년이 지나면 인력거꾼은 죽게 마련이라는 끔찍한 말을 너무도 태연하게 하고는 사라진다. 이들 작품을 통해 1920년대 중반 한국소설에는 생존의 극한에 내몰린 하층민을 대표하는 직업으로 인력거꾼이 자주 등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발표된 때로부터 9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대중교통 운전자들의 처지는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러 통계자료를 보면 김첨지의 고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시내버스 교통사고율은 일반 승용차의 4배가 넘는데, 이것은 기사들의 열악한 처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전국 노선버스 기사들은 충분한 휴식 시간 없이 하루 15시간 이상을 근무하고 다음 날 하루를 쉬는 격일제 근무를 한다고 한다. 거기에다 대중교통 운전자를 향한 폭행범죄가 지난 한 해만 무려 3149건이 발생했다는 놀라운 기록도 있다. 질병과 철빈과 폭력과 미신이 가득했던 김첨지의 동소문 근처 행랑방과 인력거는 분명 사라졌지만, 2017년 서울의 어느 곳에선가는 또 다른 고통으로 채워진 우리 시대 김첨지들의 공간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경재 숭실대 국문과 교수

[문화닷컴 바로가기|소설 서유기|모바일 웹]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