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④ '토정비결'에 숨은 뜻은?

2008. 1. 9.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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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전반에 채색필사본으로 제작된 '경강부임진도(京江附臨津圖, 규장각 소장). 토정 이지함이 당시까지 일반인에게 널리 각인돼 있어 그가 살았던 지역이 '토정'(土亭·현재 서울 마포구 용정동)으로 지도에 나타나 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토정비결(土亭秘訣)'. 믿든 말든 한 해 자신의 운수를 점쳐보면서 새해를 계획해보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풍습으로 굳어졌다. 대부분 오래된 우리의 전통으로 알고 있지만 '토정비결'은 정작 조선시대의 새해 풍습 목록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토정비결'의 저자가 조선시대의 학자 이지함(1517∼1578)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 이지함의 저작이니 당연히 16세기부터 유행한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빌린) 저작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지함의 이름을 빌린 것일까? '토정비결'과 이지함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러한 의문들을 풀어보기로 하자.

이지함의 행적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토정비결' 하면 이지함을 떠올린다. '토정비결'은 '주역'의 이치를 응용하여 한 해의 운수를 알기 쉽게 풀이한 책이다. 그러나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역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주역의 기본 괘는 64개인데 '토정비결'에는 48개의 괘만이 사용되고 있다. 괘를 짓는 방법도 달라서 이른바 사주 가운데 시(時)를 뺀 연(年), 월(月), 일(日)을 사용할 뿐이다. 조선시대 민간에는 시계가 없어 시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편의를 도모한 것으로 생각된다.

◇토정이 말년에 현감으로 재직했던 충남 아산시 영인면에는 그의 동상과 아산현 관아 정문이었던 여민루가 세워져 있다.

이처럼 '토정비결'은 주역을 이용하면서도 조선적인 특성과 백성들에 대한 편의를 십분 고려했다. 그러다 보니 점괘의 총수도 주역과는 다르게 됐다. 주역에는 총 424개의 괘가 있으나 '토정비결'은 총 144개의 괘뿐이다. 훨씬 간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토정비결'은 열두 달의 운수를 시구(詩句)로 적어 놓았다. 총 6480구로 구성되었으며, "동쪽에서 목성을 가진 귀인이 와서 도와주리라" "관재수가 있으니 혀끝을 조심하라"는 식이다. 간단명료한 글귀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점괘다. 항목마다 길흉이 적절한 비율로 배합돼 있어 낙관도 실망도 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토정비결'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그런 점에서 '토정비결'은 운수를 판별하는 데 중점이 있다기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함께 제기되고 있다. 숙종 때 그의 현손인 이정익(李楨翊)이 이지함의 유고를 모은 문집인 '토정유고'를 간행할 때 '토정비결'이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현재 유행하고 있는 '토정비결'이 이지함의 저작일 가능성은 떨어진다. 특히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망 직후에 유행한 것이 아니라 300여년 뒤인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을 고려할 때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

예를 들어 정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조선 후기 풍속 전반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데, 정월의 경우 세배하기나 세찬(歲饌), 떡국 먹기 등의 새해 풍습과 함께 새해의 신수를 보는 점으로 오행점(五行占)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저술 '경도잡지(京都雜誌)'에도 새해의 풍속 중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다"는 기록이 있는 반면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만약 '토정비결'이 조선시대에 유행하였다면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틀림없이 소개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국 '토정비결'이 빨라야 19세기 이후에 유행했다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토정비결'은 16세기를 살았던 이지함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누군가가 이지함의 명성을 빌려 쓴 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토정비결'에 담긴 뜻과 이지함의 사상은 둘을 저작물과 저작자의 관계로 보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서로 통하는 면이 많다. '토정비결'에는 '주역'에 바탕을 둔 상수학(象輸學)적인 사고가 많이 내포되어 있는데, 이지함은 스승인 서경덕으로부터 상수학을 배웠으며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고 한다. 서경덕을 비롯한 16세기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들은 대개 기(氣)에 주목하여 당시의 사회를 안정보다는 변화가 필요한 시기로 파악했다.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이지함이었던 만큼 주역 사상에 내포된 새로운 변혁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점에서 '토정비결'에 담겨 있는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이지함의 사상과 연결할 수 있다. 이덕형이 이지함을 두고 말하기를 "세상이 풍수를 숭상하고 믿게 된 것은 이씨 집안에서 시작되었다"고 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맥락이 닿는다.

◇토정 이지함의 묘 앞에서 내려다본 보령 앞바다.

이지함의 자는 형백, 호는 토정,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고려 말의 성리학자 이곡과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손으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이곡과 이색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이색의 아들 종선은 관직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후 이지함의 가문의 영예는 조금 퇴색하는데, 조부 장윤과 부치는 각각 현감과 현령 직에 머물렀다. 이처럼 이지함은 이색을 배출한 한산 이씨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처사의 삶을 살면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러한 유랑생활을 통하여 생활고에 시달리는 많은 백성을 접하였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의 핵심이 민생문제 해결에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지함은 매우 개방적인 사람이었다. 신분이 미천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문인으로 받아들였으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격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지함은 전국을 유랑하며 현지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또 가난한 주민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고르게 분배해 주었으며,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어 수만 개를 수확해 바가지를 만들어 곡물 수천 석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했다. '토정유고'를 비롯하여 '연려실기술'이나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나오는 이지함에 관한 일화들은 백성들의 편에 섰던 이지함의 치밀한 계획과 적극적인 실천 모습이 나타나 있다. 명문가 출신의 선비가 백성의 이익을 위해 말업으로 치부되던 수공업, 상업, 수산업에 직접 종사했던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어우야담'의 다음 기록은 이지함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묵한 길에 흙을 쌓아 가운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되는 흙집을 짓고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 밤에는 집 아래서 자고 낮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 거처하였다. 또 솥을 지고 다니기가 싫어 쇠로 관(鐵冠)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밥을 지어 먹고 씻어서 관으로 쓰고 다녔다.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것을 빌리는 일이 없었다. 스스로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겪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고 여겼는데, 심지어 남에게 매 맞기를 자청해 시험해 보려 하였다."

◇'토정유고' 서문.

점술이나 관상비기(觀象秘記)에 능했던 이지함의 사상적 성향, 그리고 백성들과 함께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모습이 후대에도 길이 기억되면서 이지함은 '토정비결'의 주인공으로 남았고, 현재까지 그 이름이 회자(膾炙)하고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토정비결'에 투영된 이지함의 이름 석 자는 백성의 편에 서서 살았던 한 지식인을 후대에까지 널리 기억하게 하고 있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류의 책에 그에 관한 기록이 풍부한 데서도 발견된다. '대동기문'에는 이지함이 스스로 상업행위에 종사한 일과 거지 아이에게 옷을 벗어 준 일화 등이 소개되어 있으며, '동패락송'에는 이지함이 괴상한 행동을 하다가 노인의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계집종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했다는 이야기, 음률(音律)을 아는 이인(異人)과 장도령을 만난 이야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모두 이지함이 민간에서 격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응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지함은 스스로에게는 철저히 엄격했으나, 일반 사람을 접하는 데는 매우 온화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질 또한 민중들을 쉽게 만나는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토정비결'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하는 것은 어려운 시대에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직접 듣고 어려움을 해결한 그의 행적이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토정비결'은 16세기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이후의 시대까지도 백성들에게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하던 이지함의 이름을 빌림으로써, 현재까지도 새해 우리들의 삶 속에 빠지지 않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새해에는 '토정비결'과 함께 그 속에 담긴 이지함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다음에 계속)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 shinb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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