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돌주먹 조동범과 스승 이흥수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근성과 승부욕의 복서 조동범
제자 키우고 그 천적도 키운 이흥수 감독
조동범, 미래의 세계챔프도 두번 잠재워
23살에 은퇴..복싱 심판으로 변신해

선수에서 심판으로 변신한 조동범

지난 7월 27일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에 위치한 다목적회관에서 생활체육대회가 열렸다. 마침 경기도 구리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민기 관장과 함께 방문했다. 김 관장은 국내 아마복싱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한 전설의 복서다.

애초엔 태릉선수촌에서 최장수지도자로 15년을 근무한 박형춘 전 감독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이미 떠나고 안 계셨다. 그 현장에서 눈에 들어온 사람은 경기도 심판위원장 이흥수 감독, 아마복싱 국가대표로 국제대회 4관왕을 달성한 조동범 심판 두사람이었다. 조동범을 그렇게 오랜만에 만났다.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했을 때 조동범(왼쪽)과 김민기.

신림중학교 복싱부 입문

1968년 서울 태생인 조동범은 1982년 관악구에 위치한 신림중학교 2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 체육교사 이민호 선생이 복싱부를 창단하자 복싱에 입문했다. 당시 학교는 체육관이 없어 근처의 덕흥체육관을 임대했다. 또 순회코치가 조동범을 포함한 학생들을 지도하는 식이었다.

천부적으로 묵직한 파워와 강철 멘탈을 지녔던 조동범은 금방 운동에 적응했다. 그는 1년만인 1983년 제12회 소년체전에 스몰급(39㎏)으로 출전해 값진 동메달을 따냈다. 당시 이 체급 금메달리스트는 부산 대표인 양석진이었다. 1984년 서울체고에 진학한 조동범은 이흥수 감독의 조련을 받으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 해 9월 열린 전국 복싱협회장배 선수권대회에 코크급(45㎏급)으로 출전, 결승에서 박래영(경상공고)을 꺾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미래의 세계챔프에게 '카운터'를 날리다

1985년 5월 당시 고교 2년생인 조동범은 월드컵 선발전에 겁 없이 출전, 성인무대에 도전했다. 2회전 상대는 세계청소년대회 4강에 올랐던 최희용이었다. 전국체전 4연패를 달성한 관록의 최희용은 신예 조동범에게 1, 2회 각각 한차례씩 다운을 뺏아 무난한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3회전 공이 울리기 전, 코너에 있던 이흥수 감독이 조동범에게 상대가 들어올 때 라이트카운터를 날리라고 주문했다. 이 감독은 조동범을 훈련시킬 때 1만가지 동작을 한 번씩 때리는 것보다 한가지 동작을 1만 번씩 때리는 주문을 항상 하곤 했다. 3회전에 돌입하자 조동범은 평소에 배운대로 들어오는 최희용을 향해 회심의 라이트 카운터를 날렸다. 3회 28초만에 조동범의 RSC승리였다.

1986년에는 한국체육대를 예약한 조동범은 전주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 2차 선발전에 파죽지세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1년전 맞대결한 최희용이었다. 이 대결에서도 조동범은 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고교생으로 유일하게 국가대표 선발전우승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조동범에 2연패를 당했던 최희용은 1987년 프로에 전향, 세계타이틀 2체급을 석권하며 조동범에 당한 상흔을 달랬다.

조동범이 선발전 우승을 차지했던 대회에서 플라이급은 김광선, 밴텀급은 문성길, 미들급은 신준섭, 라이트 헤비급은 곽귀근 등 거물급 복서들이 차지하는 등 모두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조동범은 이어 12월에 개최된 제36회 학생선수권대회에서 또 우승, 플라이급의 전병성, 페더급의 김석현, 라이트 웰터급의 최임곤, 웰터급의 나홍진, 미들급의 전경준 등과 함께 서울체고 6체급 석권의 주역이었다. 학교는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이흥수 감독은 최우수지도자상을 받았다. 학원 스포츠계에서 한 팀이 전국대회에서 6체급을 석권한 것은 한국 복싱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었다.

그해 제67회 전국체전에서 조동범은 '제2의 허영모'라 불리는 전남대표 박성춘을 판정으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순천 금당고 3학년이던 박성춘은 그해 재팬컵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망주였다. 한편 서울체고를 거쳐 상무의 복싱감독으로 부임한 이흥수 감독은 2001년 동아시아대회 선발전에서 전체 11체급중 상무 소속팀이 8체급을 석권하면서 지도력을 검증받은 명감독이다. 또한 국내 최초로 올림픽에 3회연속 국가대표팀 지도자로 참여한 명장이다.

서울 올림픽 선발전에서 오광수와 격돌하는 조동범(왼쪽)

다음해 한국체대에 진학한 조동범은 그해 9월 태릉선수촌에서 개최된 88서울올림픽 2차 선발전에서 국가대표 간판 오광수와 일전을 벌인다. 조동범의 한국체대 3년선배인 오광수는 1985년 월드컵 금메달, 1986년 세계선수권 동메달,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간판복서였다.

이 대결에서 조동범은 1회 한차례 녹다운을 빼앗으며 주도권을 잡고, 2회엔 체력이 소진된 오광수가 클린치를 연발하자 한차례 파울을 얻어내는 등 5 대 0 완승을 거뒀다. 관록의 오광수가 그동안 각종 선발전에서 김광선, 김용상, 서정수, 장경재 등에게 패한 적은 있었지만 녹다운을 당하면서 완패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국가대표로 발탁돼 태릉 선수촌에 입촌한 조동범은 국제대회에서 7관왕을 차지한 김광선과 스파링을 펼쳤다. 그러나 관록이 묻어난 김광선과 연습경기에서 예상한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자 화가 난 조동범은 링에 내려오자마자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바닥에 던져 버리는 돌발행동을 연출했다. 당시 선수촌에는 곽귀근, 민병용, 정희조, 백현만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새내기 조동범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한국체대 4년 선배인 허영모가 대선배들 앞에서 "어린 녀석이 이런 경솔한 행동을 하냐"고 크게 다그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행동은 필자에겐 다르게 느껴졌다. 그만큼 역설적으로 조동범은 그런 불타는 근성과 승부욕이 있었기에 사각의 링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근성과 승부욕으로 가득 차

그해 템머 국제복싱대회에 출전한 조동범은 강력한 우승 후보인 폴란드의 나로드를 3회 RSC로 잡고 금메달을 획득, 그해 대한복싱협회 최우수 신인상을 받았다. 이어 1988년 2월에는 제 11회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 출전, 결승에서 필리핀의 타바나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고, 다음달에 열린 제1회 서울컵 대회에서는 1987년 유고 월드컵 금메달 리스트인 불가리아의 폴리코프를 2회 48초만에 RSC승을 쟁취하고, 이어 러시아의 노오란과 대결에서도 3회에 RSC로 제압했다. 국제무대에서도 그의 주먹이 통한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월드컵 금메달리스트인 폴라코프에 맹공을 가하는 조동범(오른쪽)

이때 88서울올림픽 최종선발전을 앞두고 조동범에게 치명적인 1패를 당한 오광수가 한국체대를 졸업한 후 상무팀에 군무원으로 자원(自願) 입대한다. 국제대회에 여러차례 입상해 병역면제 혜택을 받은 오광수가 제 발로 군팀인 상무에 입성한 것은 상무 복싱팀의 이흥수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동범을 꺾고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었던 간절함 때문이었다.

그해 7월 개최된 올림픽 최종선발전 결승에서 숙적 조동범과 오광수가 외나무다리에서 진검승부를 펼쳤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오광수가 조동범에 두차례 스탠딩 다운을 뺏으면서 완승하면서 극적으로 올림픽 호에 승선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면 오광수가 상무에 입대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일진일퇴 승부...프로 문 앞에서

이 경기는 조동범에게도 좋은 상처가 됐다. 그는 오광수에 당한 패배를 디딤돌로 더욱더 단단해진 복서로 재탄생했다. 1989년 고교 시절 3연패를 당한 숙적 양석진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출전, 본선에서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세계랭킹 8위 북한의 김덕남과 일전을 벌인다. 조동범은 김덕남과 마치 백마고지 사투같은 치열한 대접전 끝에 24대 20 극적인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돼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상무 시절의 조동범(오른쪽)과 이흥수 상무감독.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플라이급으로 오른 뒤 이창환에 판정패를 당한 조동범은 1991년 한국체대를 졸업한 후 그해 6월 상무에 입대, 이흥수 감독과 해후했다. 그해 9월 제 6회 세계선수권 대표선발전 준결승전에서 라이트 플라이급으로 출전해 서울컵 은메달리스트 강형석과 맞대결, 3회 RSC승을 거뒀다.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는 현역 국가대표 김진호였다.

그해 김진호는 한미 국가대표 대항전에서 1989년, 1991년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미국의 에릭 그리핀을 꺾은 최강 복서였다. 이 대결에서 조동범은 2회 중반 한차례다운을 빼앗는 등 공세를 취한 끝에 18대 11 판정으로 제압, 대표팀에 복귀했다. 1992년 조동범은 바로셀로나 올림픽 선발전에서 남기춘, 한광형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올림픽 본선 2회전에서 탈락하자 127전 109승(67KO) 17패의 전적을 뒤로 하고 아마복싱 생황을 접었다. 이어 화랑 체육관 장병오 회장의 러브콜에 계약금 1억원에 제시받고 프로행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복싱심판으로 변신한 조동범(왼쪽)과 경기도 심판장이 된 이흥수 전감독(오른쪽)

당시 23세의 조동범은 88서울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인 김광선에 비해 상품성이 높았다. 하지만 심사숙고한 조동범은 최종적으로 프로행을 거부하고 은퇴했다. 조동범은 현재는 경기도 광주에서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안정된 삶을 보내고 있다. 건실한 사회인으로 변신한 조동범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