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설계 전문가가 소개하는 건축조명의 세계_ 1편

조회 2,2402025. 1. 8.
마법의 조명, 조명만 바뀌어도 공간이 달라진다

조명이 그저 어두운 곳을 밝히는 장치라고만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거주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높일 수도 있는 것이 조명이다. 조명설계전문가 차인호 교수를 통해 매월 조명설계의 세계와 실제를 만나본다.


2012년 어느 가을 저녁, 붉게 물든 창밖 하늘 배경으로 어둑해지는 안방 소파에 앉아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에 몰입하고 있었다.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어둠을 더 만끽하고 싶었고 조명도 켜기 귀찮아 얼마나 어두워야 조명 없이 책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지 호기심이 들었다. 잘 되었다. 마침, 고성능 조도계도 옆에 있었다. 처음 측정한 것은 17럭스였는데 책의 12포인트 정도 되는 글자를 읽는 것이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점점 어두워져 13럭스 정도 되자 획수가 많은 한자는 30㎝ 거리에서 읽기 어려웠고 시간이 지나 0.2~0.1럭스까지 떨어지자, 책을 가까이 보아야 했고 눈의 피로감도 심해졌다. 조도계에 수치가 0이 되면서 아무 것도 안 보일 것 같았지만 그래도 꽤 오랜 시간 글씨를 분별할 정도는 되었다. 옛 문헌에 보름달 빛으로 책을 보았다는 선비의 말은 사실이다. 그 옛날 한자로 작성된 책 폰트 크기는 적어도 20~30은 되었을 것이고 보름달의 조도는 0.2럭스 정도이다. 이렇게 인간의 눈은 생각 이상으로 아주 작은 빛의 움직임도 느낄 정도로 예민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는 눈부시게 밝은 조명으로 이렇게 섬세한 빛의 맛을 느낄 수 없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자가 집중하고 있는 건축조명설계의 역할이다. 건축조명이라면 최소한의 밝기감으로 빛의 구성은 미니멀하지만 어둡지 않다. 눈부시지 않도록 쾌적한 ‘밝기감’을 아름답게 공간에 부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의 첫 졸저 <조명디자인: 공간과 인간을 위한 빛의 대안>의 초고를 마무리 짓는 시기였다. 작은 빛이라도 소중히 하는 마음으로 공간의 조명을 설계하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고 그러한 다짐이 첫 책에서 얼마나 잘 정리되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체계적인 전문 건축조명을 설계하면 눈이 편한 이유는 시지각(視知覺, Visual Perception) 인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덜 쓰기 때문이다. 시지각 인지는 안구 망막의 간상세포와 추상세포에 의해 이루어진다. 안구의 중심와에 정확하게 상을 맞추고 색까지 인지해야 하는 추상체를 쓰지 않고 밝음과 어두움 정도만 빠르게 인지하는 간상체만 사용하여 간단하게 망막의 주변부에 상을 대충 맞추어도 보이도록 하기 때문이다. 마치 카메라로 촬영할 때 정확한 오토포커스로 상을 맞추지 않고 매뉴얼 포커스로 대충 찍는 것이 배터리가 더 오래가는 것과 비슷한데 정확한 오토포커스는 카메라의 프로세서 처리가 많이 필요해 배터리를 더 소모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에서도 홍채의 동공을 조절하는 근육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된다. 그래서 눈부심 없이 공간의 효율적인 밝기감을 형성하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편하게 느끼며 공간에 리듬감을 형성하여 조형적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진다. 건축조명설계란 조명배광의 선택과 집중이고 조화와 균형을 고려한 빛의 설계이다. 조명배광이란 조명으로 공간에 부여되는 빛의 덩어리가 갖는 느낌이다.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가 건축조명을 설계한 수원시 세류동 주택 내부(건축설계: 조한준 건축사사무소)

이와 반대로 무턱대고 광원의 출력만 높여 공간을 밝히는 것이 조명의 주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눈을 지속적으로 피곤하게 만들기에 좋은 빛의 쾌적한 공간을 만들기 어렵다.

위의 사진은 우리가 작년에 진행한 서울 어느 아파트의 조명환경개선을 위한 실험으로 벽지나 바닥, 마감재 등 내부공간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조명만 바꾸어 공간의 인상에 얼마나 변화를 줄 수 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Before는 천장의 직부등만 켜둔 상태로 방 전체가 구석까지 눈부시도록 밝은 전형적인 국내 ‘1실1등’의 모습이다. 바닥의 스탠드 조명 2개는 조명환경 개선프로젝트로 새로 설치한 조명이다. After에서는 기존의 천장 조명인 직부등은 사용하지 않고 스탠드 조명 2개만 점등시켜 아늑하고 쾌적한 침실을 연출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더라도 천장의 눈부신 직부등이 없기에 눈부심이 없고 낮은 색온도와 조명기구의 확산형 배광으로 차분한 느낌의 공간이 연출되었다.

위도 같은 실험으로 바닥을 고광택 소재로 사용하는 거실의 경우 1실1등(단순히 조명의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획일적이며 공간의 조명환경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문제가 더욱 크게 드러난다.
이렇게 개선 전인 'before'와 같이 조명의 높은 휘도가 다시 바닥에 반사되어 공간 전체를 눈부시게 만들어서 불쾌한 눈부심만 가중하고 침실조명만 문제가 아니라 거실조명도 밝아서 전체적인 집안의 밝기감이 높아 숙면에 방해가 된다. 이럴 때도 스탠드조명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개선된 4의 모습을 보면 건강하고 쾌적한 밝기감으로 눈부심 없이 편안한 빛의 모습이며 바닥소재의 고광택이 주는 불쾌함도 은은한 조명으로 잔잔한 물결처럼 차분하게 정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012년에 아는 교수님의 부탁으로 살고 계시던 아파트의 조명을 새롭게 설계할 때, 거실과 안방의 천장에 있던 직부등을 걷어내고 다운라이트 몇 개와 코니스 방식의 건축화 조명으로 진행했다. 그랬더니 전기공사를 하던 사장님께서 이렇게 해도 되냐고 몇 번이나 되묻고 의아해하시던 것이 기억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건축조명이나 조명디자인에 대한 이해가 없던 시절이라 현장을 설득하기 위해 애쓴 기억이 있다.
한국에서 우리 일상 속 조명환경은 이러한 섬세한 빛의 변화를 감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많이 좋아지고는 있지만 이른 바 1실1등이라고 하는 눈부시게 밝으며 획일적인 공간이 아직도 일반적이다. 1실1등과는 반대로 그림자가 아름다운 공간, 공간의 밝기감이 시선의 방향을 중심으로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조명환경이 중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러한 공간의 경험이 없는 분들이 더 많기에 이해를 돕는 것이 쉽지 않다.


위의 두 사진은 같은 공간에 같은 배광의 다운라이트 4개를 설치한 사례다. 하지만 위쪽과 아래쪽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위쪽은 벽을 비추는 방식으로 설계하되 의도적으로 대칭을 피한 설계이고 아래쪽은 공간의 가운데에 늘어 놓았다. 미술관 전시조명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을 위한 비교로 위쪽은 주로 회화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배광계획이고 아래쪽은 가운데 조각작품을 놓고 전시하기에 적합한 배광의 예시다.

같은 크기의 공간에 같은 조명기구 6개가 설치했지만 각 광원의 밀집도에 따라 공간 가운데 놓인 오브제의 존재감은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조명의 밀집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왼쪽의 그림처럼 대상의 입체감을 더욱 강하게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부드럽게 인식하도록 할 수도 있으며 오른쪽 그림처럼 마치 사라진 것처럼 그 존재감을 거의 느껴지지 않도록 할 수도 있다.

p.059, 빛의 공간적 특성과 공간인상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 차인호 박사학위 논문, 2015

같은 공간에 같은 조명으로 비추고 있는 조각상이지만 비추고 있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연출한다. 비일상적인 조명배광 연출로 조사대상을 공포스럽게 연출할 수도 있고 벽을 비추어 대상의 표정보다는 전체적인 실루엣만 느껴지도록 할 수도 있으며 정면의 사선 45°에서 비춰 인물의 표정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앞선 세 가지 사례는 공간에서의 빛의 표현과 구성방법의 극히 일부분이다. 다양한 조명의 평면과 입면의 배치, 광원의 색온도, 연색성, 배광방식 등의 변화요소의 차이가 부가되면 같은 공간이라도 연출 가능한 경우의 수는 마치 만화경을 돌려가며 들여다보는 것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빛의 공간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설계자나 사용자가 이 가운데 무엇을 취할 것인지 또는 무엇을 중심으로 고민할 것인지 구체적인 방향성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
건축조명, 조명디자인에서 빛의 양적인 충족, 다른 말로 공간을 밝히는 것을 우선으로 하게 되면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위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조명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선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인식시킬 것인가,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무엇을 강조하여 먼저 볼 수 있도록 시지각 인지의 위계를 설정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널리 적용되어 온 기존 1실1등 방식의 환경에서는 밝음과 어둠으로 양분된 사고로만 굳어진다. 빛의 양이 아닌 질적 고민을 할 수 없게 된 것도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빛의 공간이 갖는 획일성 때문이다.
조명과 빛이 없다면 대상을 인식조차 할 수 없다. 공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조명에서도 빛의 양이 아닌 질을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글과 사진_ 차인호 교수 :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
성균관대학교 교수, 디자인학 박사(Ph.D. 건축조명 + 공간계획) 전문 건축조명설계사인 「차인호 공간조명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권위 있는 IALD(국제조명디자이너 협회)의 최고 레벨인 Professional Member이다.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에서 건축조명디자인 분야의 세계적인 거장 멘데 카오루(面出薰, LPA 대표)를 석사과정 지도교수로 모시고 건축조명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하는 싱가폴 도시계획조명, 롯본기 모리타워 등 국제적 대형 건축조명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www.inholighting.com

구성_ 신기영
ⓒ월간 전원속의 내집 2025년 1월호 / Vol.311 www.uuj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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