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언어

이재훈 기자 2025. 4. 2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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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부단한 번역의 과정이다.

바우만의 생각을 이어가자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언어에서 사회적 의제를 길어올린 뒤 숙의를 거쳐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를 시민에게 적용하면서 또 다른 소외와 억압이 발생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되짚는 과정의 반복이다.

하지만 윤석열이 지난한 절차를 거쳐 탄핵되고, 6·3 조기 대선이라는 좁은 영역의 선거 민주주의가 전개되면서 정작 시민의 언어를 정치적 의제로 길어올리는 과정은 소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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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윤석열 내란 이후 광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한 시민들. 권미리씨(왼쪽 위), 조용화씨(오른쪽 위), 김서희씨(왼쪽 아래), 박수홍씨(오른쪽 아래).

민주주의는 부단한 번역의 과정이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부수적 피해’에서 민주주의를 “사적 이해의 언어와 공적 이해의 언어 사이에서 ‘양방향 번역’을 하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민주주의에서의 정치 행위는 “사적인 관심과 욕구를 공적인 쟁점으로 재구성하고, 역으로 공적인 관심사를 개인의 권리와 의무로 재구성하는” 부단한 과정이다. 바우만의 생각을 이어가자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언어에서 사회적 의제를 길어올린 뒤 숙의를 거쳐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를 시민에게 적용하면서 또 다른 소외와 억압이 발생하지 않는지 끊임없이 되짚는 과정의 반복이다. 시민과 제도 사이에서 이 과정을 반복하는 매개가 시민사회와 정당, 그리고 언론이다.

윤석열 내란 이후 넉 달 동안 광장에선 시민의 언어가 폭발했다. 하지만 윤석열이 지난한 절차를 거쳐 탄핵되고, 6·3 조기 대선이라는 좁은 영역의 선거 민주주의가 전개되면서 정작 시민의 언어를 정치적 의제로 길어올리는 과정은 소외되고 있다. 이 때문에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이 자체 인터넷 공론장(‘천만의 연결’)에 기록된 651건의 시민 발언을 분석한 결과는 시민의 언어를 정치권에 번역해 길어올린 소중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많이 쏟아진 요구는 ‘차별금지와 인권보장’(31%)이었다.(이번호 표지이야기)

문제는 이 요구가 조기 대선에 출마한 후보들의 관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싱크탱크 ‘성장과 통합’을 출범시키며 ‘3% 잠재성장률, 세계 4대 수출 강국,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 달성’을 목표로 한 ‘3·4·5 성장전략’을 국가 비전으로 제시했다. 차별금지와 관련한 쟁점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내란 이후에도 여전히 윤석열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의 후보들은 내란에 대한 성찰 없이 ‘내가 이재명을 꺾기에 적합한 후보’라는 말만 앞다퉈 내밀고 있다. 이들이 차별금지에 대해 말하기를 바라는 건 윤석열이 내란을 반성하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2025년 4월17일 현재까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한 후보는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대선 경선 후보인 권영국 정의당 대표뿐이다.

물론 ‘차별금지와 인권보장’이 시민적 요구의 전부는 아니다. 다원화한 의제를 소화하지 못하는 정치제도 개혁, 구멍 뚫린 사회안전망과 돌봄 체계 재구축, 극심해지는 불평등과 격차 해소, 소외된 지역부터 삶을 위협하는 기후위기 대응, 무너지고 있는 중소상공인 회복, 지역소멸 극복 등의 문제도 공론장에 올라와 있다. 하지만 6월3일에 가까워질수록 이런 의제보다는 누가 승자가 되어 거대한 대통령 권력을 거머쥘 것이냐는 쟁점이 관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겨레21은 그래서 더더욱 시민의 언어를 매개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광장에서 자유발언을 했던 시민 6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비상행동이 광장의 목소리를 모아 펴낸 ‘사회대개혁 과제 자료집’을 살폈으며, 비상행동과 8개 정당이 연 공동정책토론회를 찾았다.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비상행동의 자료집을 인용해 밝힌다.

“광장의 시민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우리’였다. 지옥 같은 각자도생을 넘어 공동체를 복원하고 사회를 다시 만들자는 목소리였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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