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성상부터 삼성 전광판까지…바티칸에 스며든 한국

유승목 2025. 4. 2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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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한국과의 각별한 인연 재조명
2023년 9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 축복식이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의 설치 장소 인근에서 거행되는 모습. /연합뉴스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 한국을 각별하게 아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가톨릭 총본산이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12년의 재위 기간 머물렀던 바티칸은 “살금살금 스며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만큼 한국의 존재감이 커졌다. 바티칸 대성전 벽과 광장, 성직 서열 곳곳에 한국과 관련된 이름이 각인될 수 있도록 배려하면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이듬해인 2014년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한국을 찾은 이후 한국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정부, 기업과도 깊은 인연을 쌓았다. 2021년 당시 대전교구장으로 있던 유흥식 라자로 주교를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에 지명하고, 대주교로 승품시킨 게 대표적이다. 교황청 역사에서 한국인 성직자가 차관보 이상 고위직에 임명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성직자성은 전 세계 가톨릭 사제와 부제들의 생활과 직무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부처로, 성직자성 장관은 교황과 가깝게 소통하는 최측근으로 꼽힌다. 재임 내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임을 받았던 유 대주교는 2022년 한국 출신 사제 중 네 번째로 추기경에 서임 되기도 했다. 유 추기경은 이번 교황 선종 후 열리게 될 콘클라베(Conclave·교황 선출을 위한 추기경단 비밀회의)에 한국인 중 유일하게 참가한다.

그간 유럽 등 서양 출신의 성직자만 맡았던 교황청 요직에 한국인 사제를 발탁한 인선은 첫 아메리카 대륙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열린 사고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도 읽을 수 있다는 게 가톨릭계의 평가다. 전쟁과 갈등 종식에 앞장섰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재위 내내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를 강조했고, 비록 무산됐지만 유 추기경을 가교 삼아 여러 차례 방북을 추진하기도 했다.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대성전의 모습. 최근 삼성전자가 노후한 일본 파나소닉 전광판을 대신해 설치한 최신 LED 옥외 전광판 뒤로 대성전의 모습이 보인다. /유승목 기자

프란치스코 교황과 유 추기경의 인연은 삼성전자의 바티칸 옥외 전광판 교체라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매주 교황과 신자들이 만나는 장소인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는 2023년부터 삼성전자가 기부한 대형 옥외 전광판 4대가 설치돼 있다. 최대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광장이라 멀리서도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대형 화면이 필요한데, 삼성전자의 전광판이 이 역할을 하고 있다. 신자들은 선종 전날 참석한 부활절 대축일 미사에서 강복하는 교황의 모습도 이 화면으로 지켜봤다.

당초 성 베드로 광장의 옥외 전광판은 일본 파나소닉 제품이 사용됐다. 시설 노후화와 낮은 해상도로 교황청이 교체를 검토하던 중 마침 삼성전자가 손을 내밀면서 한국 기업의 제품으로 바뀌게 됐다. 이는 유 추기경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가톨릭계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이 교황청에 스며들고 있다(infiltrarsi)”면서 결과물에 크게 만족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현지시간) 오전 88세로 선종했다고 교황청이 발표했다. 사진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시복식 미사에 앞서 차량에서 한국 신자들에게 인사하는 교황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 가톨릭계가 떠올리는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가장 뜻깊은 기억은 2023년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성상(聖像)이 세워진 일이다. 한진섭 조각가가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에트라 산타에서 8개월간 작업한 높이 3.77m의 작품으로, 김대건 신부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바티칸에 동양인 성상이 설치된 건 처음이었다.

2014년 방한 당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충남 당진시 솔뫼성지를 다녀갔던 프란치스코 교황은 약 550년간 비어 있던 대성전 우측 외벽에 김대건 신부의 성상을 세우는 건의에 흔쾌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동의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대건 신부가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했던 이야기를 전하며 “이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전임 베네딕토 16세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며 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첫 아메리카 대륙 출신이자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으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포용을 주장하는 등 가장 진보적인 교황이란 평가를 받았다.

유승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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