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578] 배우 박신양이 그린 사과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5. 4. 21. 23:5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신양, 사과 10, 2022년, 캔버스에 유채, 162.2x130.3cm, 작가 소장.

지난 10일 한국에서 71년간 사목한 프랑스 출신 두봉 레나도 주교가 96세로 선종했다. ‘사과 10’은 배우이자 화가 박신양(1968~)이 두봉 주교에게서 받은 사과를 그린 회화 20여 점 중 하나다.

대한민국 성인이라면 배우 박신양을 모를 리 없다. 대중에게 박신양은 재벌 2세거나, 사채업자, 아니면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영상 편지를 남기는 순정남이다. 박신양과 극 중 인물이 이질감 없이 겹쳐 보이는 것은 그가 연기를 하는 동안 ‘바로 그 사람’이 되기 위해 극한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박신양은 현실이 매우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게 직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연기하면서 오롯이 나만의 감정과 내면을 찾는 일은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던 박신양은 두봉 주교를 찾아갔고, 두봉 주교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뒤 헤어지는 길에 사과 두 알을 보라색 종량제 봉투에 담아 주었다. 주교가 과연 그가 유명 배우인지 알았을까 싶지만, 알았더라도 뭐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신양은 그 사과를 감히 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시들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남기기로 했다. 캔버스 위의 사과는 다른 여느 사과와 닮아서는 안 되고, 주교와 한 대화가 그에게 남긴 찬탄, 감동, 전율, 그리고 감사를 담아야 했다. 오랜 시간 캔버스 앞에 서서 수없이 색을 칠하고, 형을 허물어 남은 그림은 ‘가장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을 만난 박신양의 마음의 흔적이다. 이 사과는 오롯이 화가의 것이다.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5분 칼럼'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