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라도 온 검찰·법원의 변화, 저절로는 오지 않았다
“2024년 8월부터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의견진술이 가능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안내·설명하고 있습니다.”
2025년 4월4일 수원지방검찰청에서 ‘피해자와 검찰: 등대, 다리, 대숲’이라는 제목으로 범죄 피해자 보호와 관련한 강연회가 끝나고 면담 과정에서 검사들에게 들은 말이다. 2023년 6월 대검찰청이 누리집 내 민원서식 ‘대검찰청>참여민원>민원안내>민원서식 내려받기>기타서식>53번’에 ‘피해자 의견 진술서 양식’을 올렸음에도 일선에서 실질적인 변화가 적어 아쉬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원지검의 시도가 반가웠다.
수원지검이 안내문과 직접 설명을 통해 ‘피해자 의견진술권’의 내용과 관련 보호조치 등을 적극적으로 알리자 2024년 1~7월까지 4명에 불과하던 피해자 의견진술 제도 이용자가 단 3개월 만에 23명으로 늘었고, 양형에도 영향을 미쳤다(유죄 및 실형 선고 등)고 한다. ‘활자’로서의 피해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피해자를 접한 법원의 당연한 변화다.
사건 자동통지 제도 시행
2025년 4월7일에는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인 김진주씨가 기사 한 편을 전달했다. 그간 수동 통지를 고집하던 검찰이 드디어 사건 접수부터 재판 결과까지 피해자에게 자동으로 통지하는 제도를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대검찰청, 고등검찰청, 지방검찰청, 법무연수원 등에서 검사 대상으로 강연·면담 등을 진행하면서 범죄 피해자를 위해 제일 먼저 정비해야 할 부분이 바로 ‘통지’라고 지적했지만 난색을 표하는 검찰의 입장만을 거듭 확인해야 했던 지난날이 스쳐 지나갔다. 2024년 교제살인사건 피해자 유족이 사건처분결과통지를 검찰에서 받지 못해 분노하며 고통받았던 일도 떠올랐다. 형사소송절차에서 피해자를 보호하고 참여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제때, 제대로 알려야 한다. 자동통지는 그 시작점이 될 것이다.
3월18일에는 피해자의 소송기록 열람등사(복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공포돼 9월19일부터 시행을 앞두고 있다. ‘소송 중인 피해자와 법정대리인이 소송기록의 열람 또는 등사(복사)를 신청하는 경우 원칙적으로 허용하도록 하고, 재판장이 불허하는 경우 그 이유를 통지하도록 한다’는 이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와 연대자들이 노력했던가. 물론 여전히 재판관의 재량에 의존하며, 불허시 불복절차가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소식을 접하고 그간 ‘형사소송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수사, 재판 과정에서 배제·소외를 경험하며 절규하던 피해자들이, 그럼에도 실질적 당사자로 인정받고 형사소송절차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싸우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투쟁하는 그들 덕에 일부라도 변했기 때문이다.
4월5일 성폭력예방치료센터에서 진행하는 성폭력상담교육을 하기 위해서 전북 전주로 갔다. 다양한 연령대와 성별로 구성된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교육하다 대법원 유튜브 채널을 소개하던 중 2개월 전 올라온 ‘아동을 위한 증언 안내 영상’ ‘청소년을 위한 증언 안내 영상’을 확인했다. 아직 한국어와 영어, 수어 영상만 올라와 있었지만, 2012년께 ‘모모씨 증언하러 법정 가다’라는 영상을 만들기만 하고 홍보를 소홀히 하며 던져두었던 대법원을 기억하던 나로선 이 변화가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2011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증인신문을 마친 성폭력 피해자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 이후에야 각종 증인 지원 및 보호 절차가 마련됐고, 그 과정에서 ‘모모씨 증언하러 법정가다’라는 영상을 만들어놓고도 망각했던 법원에 이 영상의 존재를 알린 게 나였다.(한국어 및 각종 언어, 수어로 만들어진 이 영상이 대법원 유튜브 사이트에 올라온 건 영상 제작 10여 년 뒤인 2022년이었다.) 성인 캐릭터인 ‘모모’와 별개로 아동·청소년 피해자를 위한 영상 제작의 필요성을 논하던 그 자리가 생각난다. 다들 각자의 위치와 역량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들
2021년께 여성 대상 폭력·살인사건 피의자·피고인을 대리하는 이들의 전략이 피해자 인신공격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던 내게 현직 법조인들은 ‘(내 말대로 하면) 의뢰인에게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텐데 설마 그러겠냐’고들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들은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다며 우려를 표했다. ‘피의자/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명목하에 피해자 공격을 서슴지 않는 가해자 쪽과 이를 묵인하는 이들의 결합이 피해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증인지원서비스와 관련해 성범죄 재판 피해자들의 91%가 만족한다는 기사를 법원에서 내보내는 사이, 난 피해자들의 자살을 지속적으로 목격했다. 2024년만 하더라도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증인신문을 마친 성폭력 피해자가 법원 화장실에서 자살 시도를 했고, 대전에선 직장 상사에게 준강간 등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광주에서도 대학 동문에게 준강간미수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가 항소심 중 자살했다. 뒤늦게 검찰 내부에서 이런 피의자·피고인 쪽의 전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기는 했으나 여전히 피해자는 추가·파생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다.
검사들과의 면담 과정에서 ‘진술조사실까지 마련해 사전에 진술 연습을 하는 법인’에 대해 성토하는 그들에게 실제 해당 법인의 대표변호사가 ‘검찰 출신’임을 강조하며 세일즈 중이고, 이런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으나 대한변호사협회 등 그 어떤 곳에서도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 없다고 지적했다. 거기에 ‘방어권 보장’을 위해서라면 ‘피해자 보호’는 후순위에 두어도 되는 가치인 양 취급하는 법원의 태도까지 더해지면서 피해자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언급하자 검찰 내에서도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외부에선 알고 있는 문제를 어떤 집단의 내부에선 모르고 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내부와 외부의 협업 필요성을 강력하게 인식한 계기이기도 했다.
3월21일 피해자 국선변호사 처우 개선 등을 포함한 ‘피해자 국선변호사 업무지침’이 개정됐다. 피해자 국선변호인의 조력 범위를 늘리는 것에만 집중하고 처우 개선, 관리감독을 소홀히 했던 법무부, 검찰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조금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단 여전히 각 지역별 피해자 국선변호인 제도 운영에 대한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라 피해자 조력의 격차 해소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지역은 피해자 국선변호인을 찾기 어려워 다른 지역 변호사를 찾아가야 하는데, 이런 현실을 법무부 등이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개정안 후 피해자 국선변호인 신청을 고민하는 현직 변호사들이 늘었다는 소식에 부족하더라도 일단 변화를 위해 내딛는 발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변화는 투쟁을 전제로 한다
4월5일, 정치권 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대표적 사례인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민·형사상 소송이 마무리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상고 여부에 대해 고심하던 피해자 김지은씨는 1차 가해자(안희정)에 대한 법적 싸움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냉혹한 사법시스템을 통해서 그가 어떤 싸움을 했는지 2018년부터 지켜본 입장에서 그의 선택이 그의 바람대로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유의미하기를 고대했으나. 현실은 여전하다. ‘박완주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1심에서 유죄(실형)가 선고됐음에도 여전히 공소사실을 부인하는 가해자와 맞서 싸우고 있다. 2015년 피해 이후 신속하고 적절한 대응을 했음에도 당시 법적 절차를 밟지 못했던 피해자는 가해자인 ‘장제원’의 자살로 법적 판단 자체가 어려워진 상황에 놓였다. ‘법대로’가 진실 규명, 피해 회복, 일상 재구성에 적절한 선택지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연대활동을 왜 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법시스템이 가해자, 강자, 다수자를 위해 기능하는 현실에서 ‘법대로’의 범주 내에서 하는 연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비아냥도 종종 접한다. 거대한 백래시의 물결 아래 냉소와 포기, 체념에 익숙해진 이들의 분노와 한탄도 늘 함께한다. 그러나 변화를 위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모두까기 인형’이라고 지칭하듯 사법시스템과 관련해 문제 제기와 비판을 주로 하는 입장이지만, 15년 전 아무것도 없던 내가 기댈 수 있던 유일한 대상이 시스템이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었기 때문에 싸웠고, 이겼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상황·상태에 따라 주저앉거나 뒤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분명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변화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절로, 알아서, 당연히 오는 변화란 없으며, 그 변화는 투쟁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바꾸었고, 바꿀 것이다.
마녀 D 반성폭력 활동가·‘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저자
*마녀 D는 성폭력 재판이 열리는 전국 법원을 찾아가 지켜보고 기록하고 공유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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