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없어도, 부지런히 자라는 중입니다 [임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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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위로 식물이 보이지 않으면 땅 밑에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편견'을 깨는 존재가 있다.
알뿌리로 자라는 작약은 추운 겨울을 땅속에서 나며 힘을 모았다가 봄에 싹을 틔우는 기특한 다년생 식물이다.
재개발단지에서 구조해 오자마자 잘 적응해 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았는데, 작약이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아니, 꽃을 피우지 않고도 잘 자라기 위해 부지런히 힘을 쏟는 작약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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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위로 식물이 보이지 않으면 땅 밑에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편견’을 깨는 존재가 있다. 알뿌리로 자라는 작약은 추운 겨울을 땅속에서 나며 힘을 모았다가 봄에 싹을 틔우는 기특한 다년생 식물이다. 몇 년 전, 평소와 같이 봄을 맞아 열심히 재개발단지를 돌던 중 화분 모양의 흙덩이를 깨고 올라온 작고 귀여운 빨간 새싹을 보았다. 궁금해 파헤쳐보니 뿌리가 나왔다. 아무리 봐도 무슨 식물인지 모르겠기에 검색해보니 작약이었다. 아마 이 작약의 주인도 뿌리만 남은 작약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빈 화분만 홀랑 가져간 듯했다.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이라 늘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내게 우연히 와준 작약. 집으로 데려오니 쑥쑥 자랐다. 여러 뿌리를 캐온 덕에 주변에 나누고 한 뿌리는 내가 키워보기로 한 것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이던 붉은 싹은 어느새 초록색 잎으로 변해 쭉쭉 위로 뻗어 나갔다. 잎사귀 몇을 뽐내며 잘 자라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은 벌써 작약 꽃밭이나 다름없었다. 어떤 색의 꽃이 필까? 당연히 자주색이려나? 아니면 조금 연한 분홍색일 수도 있어! 꽃 피면 알겠거니 싶어 기다린 지도 몇 주째.
어느새 겨울이 왔고 작약 잎은 시들었다. 꽃이 왜 안 피었을까? 화분이 좀 작았나 싶어 더 큰 데로 옮겨 다시 심어주었다. 재개발단지에서 구조해 오자마자 잘 적응해 꽃을 피우는 식물이 많았는데, 작약이 조금 힘들어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내년에는 꼭 꽃을 피워주겠지? 바람이 무색하게 그다음 해에도 꽃이 피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궁리해보았지만 잎을 꾸준히 내는 모양새를 보니 환경이 아주 싫거나 병든 것은 아닌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구조한 상사화도 그랬다. 잎사귀는 실컷 구경했는데 꽃은 끝내 보지 못했다. 왜 번식하기를 포기했을까? 무엇이 이 식물의 성장을 중간에서 멈추게 했을까? 애타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앙상한 채로 겨울을 지내다가 따뜻한 봄이 오면 수줍게 틔운 싹으로 얼어붙은 마음을 살며시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그래, 의도치 않게 터전을 떠나 작은 화분에 갇혔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꼬. 죽지 않고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작약을 비롯해 일부 식물의 경우 잦은 분갈이는 꽃을 보기 어렵게 한단다. 상상도 못한 이유였다. 잘 자라라고 애써 분갈이를 해준 것이 도리어 작약을 힘들게 했다니. 으레 꽃 피는 식물이라면 적당히 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꽃을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환경이 맞지 않으면 꽃망울을 만들기보다 제 몸집 키우는 것을 더 우선으로 여기나 보다 싶었다.
날이 아직 추운 요즘, 다시 새빨간 싹을 내준 작약을 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분갈이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올해엔 꽃을 피울까 살짝 기대도 해보지만, 한편으론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때가 되면 피우겠지. 아니, 꽃을 피우지 않고도 잘 자라기 위해 부지런히 힘을 쏟는 작약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다음을 도모하며 조금 쉬어가는 시기를 보내는 것도 괜찮다는 사실을 작약이 가르쳐준다. 꽃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지금의 환경에 맞춰 현명하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작약은 참 아름다우니까.
백수혜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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