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쇼미더컬처] “합시다, 러브” 그곳을 지키는 힘

강혜란 2025. 4. 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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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란 문화선임기자

일주일간 경북 북부를 초토화시킨 ‘괴물 산불’이 진화되면서 역대 최대 산불 피해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경북도 집계에 따르면 2022년 울진·삼척 산불 피해액(9085억원)을 넘어 1조원을 넘길 전망이란다. 여기엔 국가유산청이 지난 1일 집계한 총 33건(국가유산 기준)의 문화유산 피해도 포함된다. ‘천년 고찰’을 자랑하는 의성 고운사의 경우 보물로 지정된 가운루와 연수전이 잿더미로 변했고 청송 사남고택, 안동 지산서당 등도 전소됐다. 자산가치로 가늠하기 힘든 수백 년 세월이 녹아버렸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과 애신의 ‘러브’가 시작되는 이 장면은 안동 만휴정에서 촬영됐다. [사진 넷플릭스 캡처]

그나마 반가웠던 소식은 안동 만휴정의 무사생환이다. 지난달 25일 화마가 뻗치면서 한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다음 날 큰 피해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조선 16세기 초 문신인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지었다는 이 정자는 주변 원림(숲)까지 아름다워 2011년 국가지정 명승이 됐다. 그렇다 해도 이곳이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의 촬영지가 아니었다면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졌을 리 없다. 이번 산불 때 가슴을 졸이게 만든 안동 병산서원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공교롭게도 지난해 KBS 드라마 촬영팀이 이곳 만대루(보물)에 못을 박고 훼손시킨 사건 탓에 유명세를 더한 건 아이러니다.

사람에겐 어떤 장소와 강한 관계를 형성하면 그곳을 자신의 정체성 일부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장소 애착 이론’). 나아가 꼭 방문하진 않아도 역사적인 배경이나 문화적 의미를 알면 감정적 애착을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내러티브 교감 효과’). 2019년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때 세계인들이 애도한 것도 한 번쯤 가 본 추억 외에도 노트르담을 둘러싼 많은 소설·영화의 잔향 때문이다. 만휴정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계곡물을 가로지른 통나무다리에서 애신(김태리)에게 유진(이병헌)이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하던 장면을 잊긴 어렵다. 2008년 숭례문이 불타는 걸 지켜본 상실감에 또다시 생채기가 덧날 뻔했다.

일각에선 만휴정에 화마가 접근하기 전 촘촘히 씌운 방염포(화재 차단용 특수 천)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제 효과는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다만, 화재 진압 현장 인력을 포함해 무수히 애쓴 사람들의 노력이 있어 그나마 참화를 줄인 건 분명하다. 문화재의 가치와 관련해 “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진 작품들은 더 이상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다”(김영복, 『옛것에 혹하다』)고들 한다. 문화유산이 각별한 건 그 긴 시간을 버티게끔 지키고 가꿔 온 사람들의 이야기에 힘입는다. 달리 말해 이를 훼손하는 건 그 노력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함께 보호하고 애쓴 기억의 교집합이 많을수록 공동체가 단단해진다. 과연 문화유산만 그러하겠는가.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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