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신고가 왜 10년씩 걸리냐 묻는다면 [이경자 칼럼]
이경자 | 소설가
살인 사건은 1991년 1월30일에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인이었던 성폭행(강간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은 1970년에 일어났다. 그러니까 성폭행을 당한 뒤 21년이 지난 뒤에 범인을 살해한 것이다.
살인범 김부남씨는 1심 3차 공판에서, “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2025년. 나는 왜 55년이나 지난 뒤에 새삼 이런 글을 쓰려고 할까?
최근에 장제원 전 의원이 자신의 비서로 일하던 여성을 항거불능의 상태에서 성폭행(준강간치상)한 혐의로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는보도가 있어서다. 당사자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그 ‘즉시 고발’하지 않고 이제 와서 사건을 고발하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을뿐더러 10년 가까이 지나서 고발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런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무려 1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을 거론하면서 이와 같은 고소가 갑작스럽게 제기된 데는 어떠한 특별한 음모와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든다”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 “누명을 벗고 돌아오겠다”며 소속 정당에서 잠시 떠나 있겠다고 탈당했다.
다시 김부남씨에게로 돌아가보자.
사건이 일어난 1970년, 김부남은 아홉살 소녀였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먹어야 하는데 이웃의 아저씨네 집에 우물이 있었다. 어느 날 우물에서 물을 긷는데 아저씨가 소녀를 방 안으로 유인하고 성폭행을 했다. 34살 된 아저씨가 아홉살 소녀를 성폭행해서 사타구니가 찢기고 허벅지의 뼈가 빠개지듯 아파서 걸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저지른 후에, 그는 두렵고 아파서 울고 있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 이야기를 너의 부모님에게 말하면 가족을 다 죽여버리겠다….
이로써 그 아저씨는 소녀의 몸과 마음에 범죄를 완결 지었다고 할 수 있다. 피를 흘리고 허벅지가 빠개지는 것 같아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말도 하지 못하는 공포와 절체절명의 고립감. 물론 어머니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웃집 아저씨가 가족을 죽일까 봐. 게다가 소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물을 길어 와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 다른 여성들처럼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이 잘 안되었을 것이다. 이혼을 하고 재혼을 했다. 재혼한 남편은 부부 생활이 잘 안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했다.
1991년, 그 일이 있었던 뒤로 21년이 지났다.
그런 어느 날 김부남씨는 흉기를 사서 고향으로 갔다. 34살이던 범인은 55살이 되어 있었고 중풍으로 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부남씨는 가지고 간 흉기로 범인의 사타구니를 공격했다. 그 남자는 죽었다. 부남씨는 짐승을 죽인 것이다.
의사는 김부남씨가 잠재적 정신분열을 가졌다고 했고 국회에선 1994년 1월5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의 특별법을 제정했다. 1997년에는 13살 미만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을 비친고죄로 변경했다. 친족에 의한 성폭행의 경우 친족 범위를 4촌 이내의 혈족과 2촌 이내의 인척으로 확대해 의붓아버지의 성폭행도 처벌할 수 있게 했고 2011년과 2019년 두차례에 걸쳐 단계적으로 13살 미만 아동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이런 법 제정의 기회는 김부남이란 한 여성의 삶이 난도질당한 뒤에야 가능했다.
김부남씨에게서 보았듯이 한 여성의 인격을 살해한 성폭행이나 그와 유사한 성범죄 피해 여성들은 그 피해로부터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존엄성을 회복하고 그 범죄의 실체로부터 자기 존재를 바로 세울 수 있기까지 세월이 걸린다. 그래야만 비로소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어떤 범죄인지, 확연하게 보일 테니까. 그리고 그건 질병처럼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피해다.
아마 이 글을 쓰려는 동기를 부여한 비서 ㄱ씨에게도 9년의 치료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비서 ㄱ씨 쪽은 ‘장 전 의원이 가지고 있는 막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 성폭력 신고 이후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해 형사 고소를 하지 못한 채 9년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왔다’며, ‘더 이상 피해자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고, 엄중한 법의 심판을 구하기 위해 고소에 이르렀다’ ‘장 전 의원이 해야 할 일은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원고를 쓰기 시작한 다음날 아침, 뉴스에서 장 전 의원의 사망 보도를 보았다. 그는 ‘미안하다…’는 유서를 가족에게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날, 피해자는 사건의 진실을 밝힐 동영상과 피해 이후 검진한 병원의 진료 자료들을 경찰에 제출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해결 방법밖에 없느냐며 고인의 명복을 비는 한편, 피해자의 안전을 꼭 도모해달라고 말했다.
피해자인 ㄱ씨. 10년이 다 되도록 그 피해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서, 살아나기 위해 법에 의지했다. 그런데 가해자는 모든 범행 사실을 부인한 채,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왔음을 인지한 뒤 죽음을 선택했다. 피해자에겐 또 다른 심리적 가해가 이뤄졌을 것이다. ㄱ씨가 원했던 건, ‘사실 인정과 진정한 사과’였다. 오로지 자존을 회복하기 위해서.
내가 자라던 어린 시절, 1960년대엔 남성으로부터 성폭행 등의 피해를 당했을 때, 사회적 시선은 피해 여성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성이 피해를 법에 호소하기는커녕, 남이 알게 될까 봐 숨기려 했고 알려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조차 있었다. 세월이 지나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는데, 남성은? 새로운 기술로 다양하게 여성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착취하는 일은, 나날이 발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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