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으로 막 내린 젊은 지식인의 혁명
막다른 길에 부딪혔을 때, 양명(梁明)은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1930년 중반, 국외 근거지에서 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국제당 동방비서부의 지휘를 직접 받지 않는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종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부도덕한 반혁명 분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국제당은 여태까지 문제 삼지 않던 일국일당 원칙을 국외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운동을 계속하고자 한다면 현지의 공산당에 입당해야 했다. 만주와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근거지로 활발하게 전개해오던 양명이 속했던 공산당의 재건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중국에 계속 체류하기로 한 동료들은 중국공산당에, 일본에 있는 이들은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국내에 잠입해 비합법 노동운동에 뛰어든 동지들도 있었다.
28살, 공부 겸 떠난 망명길
양명이 러시아 영내에 입국한 때는 1930년 10월25일이었다. 만주 지린성 판스현에서 출발해, 중-소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경로를 택했다.1 두만강 건너편 중국령 훈춘에서 육로로 국경선을 건너 연해주로 들어가는 코스였을 것이다.
왜 소비에트 러시아로 입국했는가? 러시아 관헌이 입국 이유를 물었다. 양명은 “중국에서 당 사업을 지도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위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마디로 ‘망명’이라고 표현했다.2
양명이 러시아 망명을 선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체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2년 전에 그는 3개월간 모스크바에 머물렀다. 1928년 10월 말부터 조선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국제당에서 외교 활동에 임했다. 그해 12월 ‘조선공산당 조직문제 결정’과 ‘12월테제’ 채택을 둘러싼 치열한 논의 과정에서 조선공산당(2월당, 속칭 엠엘파)을 대변했다.3 비록 자기 당의 입장을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국제당으로부터 조선당 대표에 상응하는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모스크바를 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유학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얼마 동안 공부를 시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심을 갖고 있었다.4 러시아어 능력이 아직 불충분하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사전을 찾아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태였다. 신학기 개강에 맞춰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이론과 사회과학을 깊이 공부하고 싶었다. 양명의 나이 28살이었다. 깊은 공부를 하기에 좋은 나이였다.
자신이 속한 엠엘파를 비판하다
양명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보고서를 썼다. 국제당 동방비서부 앞으로 말이다. 1930년 11월16일자였다. 국경을 넘은 지 불과 20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길지 않은 시일 동안 양명은 정치적 망명과 모스크바 여행에 필요한 수속을 다 갖췄던 것 같다. 국제당 앞으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은 조선공산당 최상급 간부의 한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내용은 1928년 12월 결정 이후 자신이 속한 공산당의 활동상에 관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문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역사 연구자들이 접하지 못하고 있다. 12월 결정이란 분열된 두 개의 조선공산당(2월당, 12월당)을 부인하고 국제당 지도하에 신당을 조직한다는 내용이었다.
뜻밖이었다. 동방비서부로부터 냉담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어느 정도 예견하기는 했지만, 그처럼 혹독할지 미처 몰랐다. 양명은 “지난 11월16일에 쓴 보고가 심히 불충분하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그 불충분함을 보완하는 새로운 글을 써야 했다. 1931년 1월24일자였다. 이 글에서 양명은 자신이 속했던 공산당을 비판하는 문장을 포함시켰다.
“M.L.(엠엘)파는 그의 주관적 목적의 여하에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다른 조선의 모든 파벌과 그의 사회적 기초를 동일히 하는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챠적 파벌이었던 동시에, ‘계급투쟁’지는 그의 최후의 이론적 기관지이었다. 그것이 조선의 지금까지의 모든 파벌 중에 있어서 가장 진보된 사회적 조건의 밑에서 산생되었고, ‘파쟁의 박멸과 전선의 통일’을 주장하고 나섰고, 가장 이론적으로 짜이었던 그만치 가장 위험한 일 분파이었던 것이다.”5
자신이 속했던 엠엘파 공산당을 가리켜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챠적 파벌’이자, ‘가장 위험한 일 분파’였다고 인정한 점이 눈에 띈다. 종전의 자기 입장을 번복한 것이었다. 그는 엠엘파 공산당이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 속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기존 견해를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위 인용문 속에는 자기 공산그룹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 있다. 자기 그룹은 각 파벌 중 가장 진보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됐고, 또 파쟁 박멸을 표방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으며, 이론적으로 가장 우수했다고 보고 있다. 우월의식이 잠재해 있었다. 다른 어느 공산그룹보다 더 낫다고 보는 견해였다.
양명은 보고서를 제출함과 더불어 자신의 희망 사항을 서면으로 제시했다. 첫째, 분파 투쟁을 더 이상 하지 않을 터이니 조선으로 파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책자와 국제당 문서를 조선어로 번역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였다. 셋째, 고등교육기관 입학을 희망하니 적절한 학교를 지정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동안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국제당 노선을 훨씬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고 건강도 좋아졌으니, 하루라도 빨리 결정해주기를 바란다고 썼다.6
당권 쥔 주류에 무릎 꿇은 혁명가
그러나 여전히 국제당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당시 조선 문제를 관장하는 기구는 동방비서부 직속의 조선위원회였다. 이 기구는 조선 사회주의 운동의 잠정적인 최고 지도부였다. 국제당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지휘하기 위해 이 위원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조선위원회 첫 번째 회의는 1930년 1월31일에 열렸는데, 멤버는 여섯 사람이었다. 쿠시넨(Куусинен), 미프(Миф), 마쟈르(Мадьяр), 최성우(崔成宇), 박애(朴愛), 박헌영(朴憲永)이 그 면면이다.
양명의 청원서를 심의⋅의결하는 곳도 이 기구였다. 보기를 들어 1930년 11월4일자 조선위원회 회의 안건 5개 가운데 하나는 양명에 관한 것이었다. 엠엘파의 “조직 상태, 잡지 ‘계급투쟁’의 폐간, 종파 청산 문제에 관해 양명과 면담할 것”을 세 명의 조선인 위원에게 맡긴다는 결정이 이뤄졌다.7
모스크바에 이제 막 도착했을 시기였다. 면담자 세 사람은 양명과는 아무런 개인적 인연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과거 공산그룹 소속도 달랐다. 최성우는 국민의회파, 박애는 상해파, 박헌영은 화요파에 속했었다. 당권을 쥔 세 조선인 위원이 보기에, 양명은 엠엘파의 분파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엠엘파 공산그룹이 파벌 가운데 하나임을 인정한 것은 수용할 수 있지만, 엠엘파가 다른 파벌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양명은 다시 한번 자기비판을 요구받았다. 그는 엠엘파 우월론을 폐기하는 새로운 문서를 작성했다. 모스크바에 체류한 지 2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핵심 문장을 읽어보자.
“그것(엠엘파)은 비단 본질에 있어서 과거의 다른 각파와 하등의 차이가 없는, 프롤레타리아트 진영 내에서의 소부르주아적 경향을 그의 사회적 계급적 토대로 하는 무원칙한 ‘파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 1928년의 국제공산당의 ‘12월 결정’과 1929년의 원산의 대파업이 있은 이후 (…) 의연히 무원칙한 분파 투쟁을 계속하였던, 실로 가장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착오를 범한 가장 위험한 ‘파벌’이었던 것이다.”8
양명은 엠엘파가 다른 공산그룹에 비해 우월한 점은 전혀 없다고 명시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가장 중대한 시기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착오를 범한 가장 위험한 파벌’이라고까지 극언했다. 3중의 의미에서 가장 열등한 공산그룹이라는 표현이었다. 당권을 쥔 주류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호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 대숙청에 휘말려 사라지다
양명의 청원은 대부분 기각됐다. 조선 국내로 파견해달라는 요청은 애초에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명과 같이 엠엘파 공산그룹의 수뇌부에서 주도적으로 일했던 사람을 신뢰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는 희망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찬가지 이유였다. 분파주의에 오염된 인물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으리라. 그 외에도 양명은 소련공산당으로 전당해줄 것을 바라는 청원서도 제출했다. 그러나 그것도 받아들여지 않았다.
양명에게 허용된 것은 연구직 일자리와 숙소였다. 그는 1931년 12월부터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과 연구원으로 수년간 일할 수 있었다. 그의 업무는 조선어 신문을 읽으며 중요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 다른 사람이 쓴 조선 문제 원고를 편집⋅출판하는 일, 조선 문제에 관한 출판물 가운데 일부를 익명으로 작성하는 일 등이었다.9책임 있는 필자가 아니라 연구보조원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양명의 숙소는 보론초보 폴레 거리 3동 9호, ‘정치망명자 중앙기숙사’였다. 제국주의의 박해를 피해 망명해 온 외국인 혁명가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상하이파 공산당의 이론가 주종건과 같은 시기, 같은 건물에 거주했음이 이채롭다. 양명은 9호실에, 주종건은 같은 건물의 16호실에서 살았다.
양명의 모스크바 망명 생활은 불운했다. 그러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련에 입국한 지 5년 만에 양명은 파국을 맞았다. 그는 1935년 10월19일 반혁명 조직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됐다. 스탈린 대숙청에 휘말린 것이다. 그는 6개월간 구금돼 취조를 당한 끝에 1936년 5월27~30일 소련 군사재판부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10
교정노동수용소에 수감돼 고된 강제노동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징역 8년이면 석방 예정 시기는 1944년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때다. 하지만 양명의 이후 행적에 관해서는 정보가 없다. 아무것도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수감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Ян-Мен, Анкета(신원조사서), 1930년 11월26일, 1~2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42 л.85-86об.
2. Lee Kang, Анкета для перевода членов иностранных компартий в ВКП/б/ (외국공산당원들의 전연방공산당 전당 신청용 신원조사서), 1932년 12월16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72 л.15.
3. 임경석, ‘양명은 왜 이동휘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한겨레21 제1459호, 2023년 4월13일 참조.
4. 梁明, ‘동무들! 내가 여기에 온 지도…’ 1931년 6월17일, 2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42 л.106-107.
5. 梁明, ‘지난 11월…’ 1931년 1월24일, 5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42 л.95-101.
6. 梁明, ‘동무들! 내가 여기에 온 지도…’ 1931년 6월17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42 л.106-107.
7. Протокол заседания корейской комиссии от 4-го ноября 1930г.(조선위원회 회의록, 1930년 11월4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21 л.26
8. 李江, ‘엠엘파의 정치적 견지의 비판’ 1932년 8월14일, 19쪽,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488 л.109-119об.
9. Lee Kang, ‘Заявление, 동무들! 나는…’ 1933년 12월25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72 л.21-22об.
10.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2)’,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년 12월,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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