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진 땅 집어삼킨 자비 없는 ‘괴물 산불’
길게 뻗은 화선(火線)이 굽이진 산 능선을 넘고 또 넘었다. 경북 의성 산불 사흘째인 3월24일 오후, 불길은 산골짜기 마을 단촌면 병방리까지 닿았다. “아버지 산소 다 타겠네.” “불이 마을 삼키겠다.” 병방리 주민들은 번지는 불길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마을에 사는 이태규씨(66)도 산 너머 솟아오른 연기를 올려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날 오후 2시50분, 주민들에게 “당장 대피하라”는 재난방송이 마을에 울려 퍼졌다. 살림이 있는데 어떻게 떠나느냐던 김숙자씨(76)도 망설이다 트럭 조수석에 올라탔다. 마을로 이어지는 1차선 도로에 트럭과 트랙터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한순간에 이재민이 되어버린 병방리 사람들의 등 뒤로 잿빛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3월21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산불이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역대급 산불로 인해 3월27일 오후 7시까지 총 28명이 사망하고, 32명이 부상당했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 피해가 특히 심각하다. 인근 안동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까지 산불이 번졌다. 3월27일 낮 12시 기준, 의성 산불 진화율은 55%에 불과하다. 의성 외에도 경남 산청과 하동, 울산 울주 등에서도 산불이 발생해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3월22일 경남 산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한 데 이어, 3월24일에는 경북 의성, 울산 울주, 경남 하동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추가 지정했다.
자꾸 늦어지는 ‘우리 마을 순서’
고온·저습·강풍이라는 세 가지 악조건이 산불 진화를 어렵게 했다. 경북 의성에서는 산불이 시작된 3월22일부터 최대 초속 27m에 달하는 강풍이 지속되었다.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은 이번 의성 산불이 ‘이례적’이라며 “영남의 공기가 예전보다 건조해지고, 겨울철 평균온도가 예년보다 높았다”라고 말했다.
산림청 발표에 따르면 3월27일 낮 12시 의성 산불에만 진화 헬기 40대, 진화 인력 3025명이 투입됐다. 같은 날 오후 6시 의성·안동·청송·영덕·영양의 산불 영향구역은 3만5697ha(행정안전부 추정치)에 달했다.이는 2000년 4월 강릉·동해·삼척·고성 산불(2만3913㏊), 2022년 3월 울진·강릉·동해·삼척 산불(2만523㏊)의 영향구역 규모를 넘어서는 역대 최대 기록이다.
3월24일 오전 11시, 불길은 단촌면 상화1리 인근 산까지 번졌다. 마을 주민들은 소방 헬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7년 전 이 마을에 정착한 이귀숙씨(63)가 애타는 목소리로 “헬기가 와야 하는데, 다른 곳이 더 급한가 보다”라고 말했다. 하늘에 보이던 헬기가 상화1리를 지나 다른 산불 현장으로 향할 때마다 주민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마을 순서’는 자꾸 늦어졌다. 정오가 지나고 나서야 소방 헬기 두 대가 상화1리 산불 진화에 투입되었다.
대피령이 떨어진 지역 주민들은 의성체육관, 의성초등학교, 의성중학교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로 이동했다. 의성체육관에는 다인용 텐트 45대가 설치됐지만, 이재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24일 체육관에서 만난 의성읍 업1리 주민 최삼필씨(84)는 “불덩이가 데굴데굴 굴러다녔다”라며 아찔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대피소가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한 이재민은 각 마을 인근 문화센터로 분산됐다. 단산문화센터로 대피한 병방리 주민들은 1층 다목적실에 모였다.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돗자리 사이사이를 청테이프로 이어 붙여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았다. 병방리 주민 김옥련씨(74)는 “가슴이 벌렁벌렁해서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집이 어떻게 되었을지 너무 궁금하다”라며 불안해했다.
일부 마을은 대피령이 해제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서 본 마을은 불길이 휩쓴 곳마다 폐허로 변해 있었다. 안평면 신월리는 의성 산불이 발생한 첫날(3월22일) 피해를 입은 마을이다. 화마가 한 차례 할퀴고 가면서 하루 동안 신월리 주택 13채가 전소됐다. 이틀 뒤인 3월24일, 마을로 돌아온 주민들은 망연자실했다. 허물어진 벽과 구겨진 슬레이트 지붕 조각들이 검은 잿더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신월리 주민 이복희씨(70)는 마스크 두 장을 겹쳐 쓴 채 마루에 앉아 새까맣게 타버린 방과 창고를 말없이 바라봤다. 아들 둘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밤새 물을 뿌린 덕분에 집 본채는 겨우 지켜냈지만, 가족사진이 걸려 있던 별채가 불에 타버렸다. 그 방에 아들이 사준 TV도 놓여 있었다. 폐허에 들어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손을 데었다. “아들이 괜찮다고 해서 안심했는데, 막상 와보니 이렇게 돼 있네. 산불이 난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우리 집에 닥칠 줄은 몰랐지.”
마을마다, 주민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소방 헬기를 찾았지만, 진화 작업에 나선 소방 헬기 역시 위험에 노출되었다. 3월26일 낮 12시51분 의성군 신평면 교안리 일원에서 진화 작업을 하던 소방 헬기 한 대가 추락했다. 헬기를 조종하던 70대 기장 한 명이 사망한 뒤 산림청은 전국에 투입된 소방 헬기의 운항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산불은 멈추지 않았다. 3월26일 풍향이 바뀌면서 의성 산불이 북상하기 시작했다. 3월27일 오전 11시 기준, 불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안동 하회마을의 직선거리 5.4㎞까지 접근했다. 경북 북부 지역 최대 도시인 안동시 도심에도 산불로 인한 연기가 가득했다. 화마가 휩쓸고 간 자리마다 검게 주름진 능선만 덩그러니 남았다.
의성·안동/사진·이명익 기자, 글·문준영 수습기자 juny@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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