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악 산불] 평생 일궈온 밤·감나무 ‘잿더미’…“먹고살 길 막막”

박하늘 기자 2025. 3. 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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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올해 농사 어쩌나…산청·하동·울주 피해지역
매실·배나무 등 대부분 불에 타
과수 정상 수확 어려워 ‘발동동’
화재에 놀란 소 비육 문제 걱정
“돌아갈 집도 없어 지원책 절실”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의 한 밤나무밭. 전소된 나무의 밑동 아래 반쯤 까진 밤송이만 간신히 남아 있다. 특별취재팀

“올개 농사는 쫄딱 망했다카이. 우에쪽 가지만 좀 탔으면 몰라, 밑동부터 다 타뿌서 다시 살릴 수도 없게 됐다 아이가.”

27일 오후 4시 경남 하동군 옥종면에 차려진 한 대피소에서 만난 심순녀씨(74·두양리)는 동네주민들과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아 비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며 바깥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당초 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비가 적잖이 내릴 것으로 예보됐지만 실제론 새벽에 잠깐 이슬비만 내리고 그쳤다.

지난 22일 산청에서 옮겨붙은 산불로 심씨가 집 뒷산에 일궈온 400평(1322㎡) 규모의 밤나무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집은 무사했지만 언제 불씨가 다시 튈지 몰라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심씨는 “얼른 수습 좀 해가 다른 살 길이라도 찾아야 할 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참 맥이 빠진다”면서 “언제 집에 돌아갈 수 있을란가 기한이라도 알면 좋겠는데, 그것도 모르겠으니 참 속이 답답시럽다”고 털어놨다.

이곳에서 만난 80대 주민은 “텐트가 빼곡하게 차 있어서 사생활도 없고, 씻는 것도, 잠자리도 불편하다”면서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가만히 있는 생활이 엿새째 이어지니 좀이 쑤신다”고 전했다.

27일 오후 6시 기준 하동 산불 진화율은 81%로 전날 같은 시간(77%)보다 겨우 4% 오르는 데 그쳤다. 28일 오후 5시엔 진화율이 94%까지 올랐지만 잔불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초 산불이 발생된 산청군 시천면의 주민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21일 저녁부터 시작된 대피생활이 일주일째지만 산불이 꺼졌다 재발했다를 반복하며 대피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천면 천평리에서 6612㎡(2000평) 규모로 감나무를 키우는 백윤조씨(70)는 감나무밭과 함께 집이 몽땅 불에 타버렸다. 동네주민이 함께 키우던 매실과 밤나무도 모조리 불타버려 마을 전체가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다는 게 백씨의 전언이다. 백씨는 “한해 농사가 문제가 아니라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도 많다”면서 “조속한 지원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7일 울산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양달마을에서 만난 노동주씨(72)는 사료로 쓸 보리밭을 살피다 맞은편에 까맣게 탄 봉분을 가리키며 쓰게 웃었다. 경운기와 농약 분무기까지 동원해 22일 대운산 일원에서 일어난 산불로부터 간신히 밭과 축사를 지켰지만, 조상님 산소는 모두 불탔고 화재로 놀란 소들의 상태가 회복되지 않고 있어서다.

노씨는 “산소 근처에 심은 대나무에 불이 붙어 펑펑 터지는 소리에 소들이 쇠파이프에 머리를 부딪혀 밤새 울었다”며 “불은 잦아들었지만 그 이후로 사료를 줘도 영 입에 대질 않는다”며 한숨지었다. 개중엔 갓 태어난 송아지와 그 어미소도 있어 비육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게 노씨의 설명이다.

공들인 농사를 망칠까 불안한 건 과수농가도 마찬가지였다. 9917㎡(3000평) 규모로 배농사를 짓는 노동열씨(70)는 과수원을 지키기 위해 지붕에 올라가 진흙까지 던지며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밭 외곽에 있는 나무 일부가 전소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살아남은 나무들도 열기에 노출돼 꽃눈이 틔지 못할까 가슴을 졸이고 있다.

울산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대운산 근처에서 배농사를 짓는 노동열씨(70)가 산불에 전소된 배나무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노씨는 “예정대로라면 4월 중순이 개화시기지만 화재 이후 기온이라도 떨어지면 저온피해까지 겹쳐 생산량은 평년보다 훨씬 떨어질 것”이라며 “당장 눈으로 드러나는 피해가 아니라 결과가 어찌 될지 몰라 그저 발만 구르고 있다”고 고개를 떨궜다.

화마가 온양읍보다 일찍 수그러든 언양읍 화장산 일대농가도 피해를 비껴가진 못했다. 강풍을 타고 불씨가 여기저기 옮겨붙어 주택과 창고 등이 전소되기도 했다.

울산 언양읍 직방리에서 벼농사를 지어온 방우일씨(88)가 산불에 전소된 창고를 바라보고 있다.

직동리에서 만난 방우일씨(88)는 “25일 대피 안내에 따라 몸을 피했다 다음날 돌아오니 벼 건조기·배출기 등을 보관해온 창고가 철제 골격만 남기고 모두 타버린 상태였다”며 “당장 작물이나 자재를 싣고 옮길 트럭도 불에 휩싸여 농사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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