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봄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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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떡국은 경남 산청에서 먹었다.
산청은 계절마다 다 다르게 아름답다고, 그러니 꽃 피는 봄에도 놀러 오라고 했다.
사장님이 말하는 봄의 산청이 궁금해서, 실은 곧 그의 다정함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꼭 다시 보자며 인사를 나눴다.
봄이 오는데, 그래서 곧 산청에 가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산불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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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올해 첫 떡국은 경남 산청에서 먹었다.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찾은 숙소에서였다.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숙소는 작은 계곡을 품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지는 곳이었다. 자연이 주는 위로 속에서 지난해 마지막 밤과 새해 첫 아침을 보냈다.
푸근한 미소로 우리를 반긴 사장님은 인심이 넉넉한 분이었다. 해가 진 저녁, 든든히 먹고 별을 실컷 보라며 저녁 식사 한 상을 내어주신 사장님이 말했다. ‘새해 첫 손님이니까 내일 아침은 내가 대접할게요. 동네 떡집에서 가래떡도 직접 뽑아왔으니.’
새해 아침, 산청에서 난 재료로 직접 만든 푸짐한 떡국 한 상을 받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떡국 국물은 진하고 고소했고, 갓 뽑은 떡은 쫄깃쫄깃했다. 사장님표 김치와 매실 장아찌를 곁들여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은퇴 후 고향 산청으로 돌아와 숙소를 운영하는 사장님은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을 위해 김치와 장아찌를 넉넉히 담근다고 했다. 그는 손님들이 꼭 할머니 집에 놀러 온 것 같다는 얘길 자주 한다며 웃었다. 짧은 대화만으로도 그가 산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과의 만남을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넘치는 환대를 받고 숙소를 떠나는 길에 사장님은 기어코 우리에게 선물을 한아름 안겼다. 혹여나 국물이 샐까 단단히 싼 묵은지와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귀한 산청 감으로 만든 말랭이였다. 산청은 계절마다 다 다르게 아름답다고, 그러니 꽃 피는 봄에도 놀러 오라고 했다. 사장님이 말하는 봄의 산청이 궁금해서, 실은 곧 그의 다정함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꼭 다시 보자며 인사를 나눴다.
봄이 오는데, 그래서 곧 산청에 가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산불 소식을 들었다. 봄이면 지천일 꽃 대신 검고 붉은 화마가 그 아름다운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고 있다. 산청뿐만 아니다. 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은 바람을 타고 안동, 영양, 청송과 영덕으로 번지고 있다. 봄을 기다렸을 지역의 산림이 새카만 재로 변하는 동안,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의 눈물과 불길 속으로 뛰어든 이들의 헌신과 안타까운 희생이 계속되고 있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마음이 무거운 매일이다.
어제는 남편과 함께 산청에 계신 사장님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눴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다행히 사장님과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사장님의 집은 가까스로 불길을 피해 무사하지만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자신의 집이 화마를 피했다는 안도감보다 이웃들의 비극에 함께 슬퍼하는 마음이 더 크신 것 같았다. 여행자들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시는 그분이 이웃들에겐 오죽할까 싶어 그저 안타까웠다.
이 거대한 재난 앞에 속수무책인 나는 목숨을 걸고 산불 진화 현장에 뛰어든 이들의 용기와 노고에 그저 감사하며, 발 빠른 이웃들을 따라 이곳저곳에 보잘것없는 기부금을 보내는 게 전부다.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것뿐인 게 부끄럽지만, 겨우 이만큼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음에 덜 무력하다.
기적처럼 단비가 쏟아져 더 이상 불길 확산과 잔불을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산불이 잦아들고 잿더미 속에서 누군가 다시 희망을 말할 때, 그곳으로 달려가 내가 받은 것들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다면 좋겠다. 겨울의 산청이 내게 건네던 가만한 위로와 넘치는 다정을. 그래서 우리가 다 함께 다시 아름다운 산청의 봄을 만들어갈 수 있다면. 설사 더디더라도 반드시 다시 올, 꽃이 지천일 그 봄을.
산불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며, 피해를 입은 주민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화마와 맞서 싸우는 이들이 매번 무탈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더 이상의 피해 없이 이 재난이 하루빨리 끝나기를 그저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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