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엔 탄내 진동…“트랙터도 이앙기도 다 탔다” 망연자실

최종권.박진호 2025. 3. 29.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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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산불 피해 눈덩이
28일 경북 영양군청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연합뉴스]
28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는 폭격을 맞은 듯 폐허로 변해 있었다. 지붕까지 완전히 주저앉은 집도 여러 채 보였다. 산과 가까운 수로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탄내도 진동했다. 길가엔 대피하려다 버리고 간 자동차가 불에 탄 채 뼈대만 남아 있었다.

18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은 경북 의성에서 올라온 ‘괴물 산불’이 확산하면서 가옥·농지와 인명 피해가 잇따른 곳이다. 지난 25일 강풍과 함께 불길이 마을을 덮치면서 오후 5시30분쯤 주민 대피령이 내려졌다. 10여 분 만에 불길이 온 마을로 번지면서 주민 대부분 맨몸으로 탈출해야만 했다. 안동시내로 대피했던 일부 주민은 지난 27일 마을로 돌아와 마을회관을 임시 숙소로 쓰고 있다.

의성군 농민들이 검게 탄 야산 옆 마늘밭에서 농작물을 관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민 강정용(75)씨는 불에 탄 집과 창고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번 산불로 594㎡(180평) 남짓한 부지에 지어진 집과 큰 창고가 전소됐다. 강씨는 “산불 확산 당시 천장에서 ‘다닥다닥’ 하는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왔더니 이미 창고와 집 천장까지 불이 옮겨붙은 상태였다”며 “10원 한 장 챙길 겨를도 없이 마을 밖으로 대피했다”고 전했다.

창고를 둘러보니 콤바인과 관리기·트랙터 등 농기계가 다 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강씨는 9.9㏊(3만 평) 농지에 벼농사와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다. 강씨는 “다음 달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려면 관리기가 있어야 하는데 모두 불에 타버렸다”며 “잠은 마을회관에서 자도 되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만이라도 제발 찾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안동시 에서 한 농민이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쳐다보고 있다. 박진호 기자
마을회관에서 만난 탁옥순(67) 부녀회장은 헌 옷 2장, 등산화, 수건, 간단한 의료용품 등이 담긴 적십자 구호 물품을 든 채 “오늘은 헌 옷이라도 받아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논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앙기와 모판 2300개는 물론 지난해 가을에 새로 산 트랙터까지 모두 타버렸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탁씨는 임하리 산불이 나기 전 아랫마을에서 먼저 대피해 온 주민들을 마을회관에서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탁씨는 “자원봉사를 하던 중 우리 마을에도 산불이 옮겨붙으면서 맨몸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며 “대피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마을 인근 다리에 한동안 고립됐다가 불길이 지나간 뒤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용찬(69)씨는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병원 치료를 받던 중 집이 불에 타는 바람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며 “몸도 아픈데 언제까지 임시 숙소에서 생활해야 할지 막막할 뿐”이라고 걱정했다.

임하1리 주민들은 이번 산불로 주택 40여 채가 전소하고 10여 채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자체 집계했다. 유창규(68) 이장은 “농작물 피해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며 “출향인들로부터 이불과 담요·전기매트 같은 구호 물품을 전달받을 예정이지만 임시 숙소에 머물기엔 고령자가 많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안동=최종권·박진호 기자 choi.jong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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