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격 맞은 듯 폐허된 마을…"살 길 막막" 헌옷 받아든 채 울었다 [르포]

최종권, 박진호 2025. 3. 2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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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에 만난 강정용(75)씨가 전소된 집과 창고를 보면 한숨을 내쉬고 있다. 박진호 기자


폐허로 변한 임하1리…주민들 망연자실


28일 오전 찾은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는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로 변해있었다. 지붕까지 완전히 주저앉은 집이 여러 채 보였다. 산과 가까운 수로에는 아직 연기가 피어올랐고, 탄내가 진동했다. 길가엔 대피하려다 버리고 간 자동차가 불에 타 뼈대만 남았다.

180여 가구가 사는 이 마을은 의성에서 올라온 ‘괴물 산불’이 확산하면서 가옥과 농지, 인명 피해가 잇따른 곳이다. 지난 25일 강풍과 함께 불길이 마을을 덮치면서 당일 오후 5시 30분쯤 주민대피령이 내려졌다. 10여 분만에 불길이 온 마을로 번지면서 주민 대부분 맨몸으로 나왔다고 한다. 안동시로 대피했던 일부 주민은 전날 마을로 돌아와 마을회관을 임시 숙소로 쓰고 있다.

주민 강정용(75)씨는 불에 탄 집과 창고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 산불로 594㎡(180평) 남짓한 부지에 지어진 집과 큰 창고가 전소했다. 강씨는 “산불 확산 당시 집 천장에서 ‘다닥다닥’하는 소리가 나 밖으로 나왔더니, 이미 창고와 집 천장까지 불이 옮겨붙은 상태였다”며 “십원 한장 챙길 겨를도 없이 마을 밖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 마을 길에 불에 탄 차량이 뼈대만 남아 있는 모습. 차량은 28일에도 방치돼 있었다. 박진호 기자


“맨몸으로 도망…집·농기계 모두 불 타”


창고를 둘러보니 콤바인과 관리기, 이양기, 트랙터 등 농기계가 다 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강씨는 9.9㏊(3만평) 농지에 벼농사와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 강씨는 “다음 달 옥수수 농사를 시작하려면 관리기가 있어야 하는데 모두 불에 타버렸다”며 “잠은 마을회관에서 자도 되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하소연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부녀회장 탁옥순(67)씨는 맨투맨 티셔츠와 후드티 등 헌 옷 2장, 등산화, 수건, 간단한 의료용품이 든 적십자 구호 물품을 든 채 눈물을 글썽였다. 탁씨는 “오늘은 헌 옷이라도 받아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됐다”며 “논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앙기와 모판 2300개가 타버렸다. 작년 가을에 새로 산 트랙터도 모두 탔다”고 했다.

탁씨는 임하리 산불이 나기 전 아랫마을에서 먼저 대피해 온 주민을 마을회관에서 돌보고 있었다고 한다. 탁씨는 “자원봉사를 하던 중 마을에 산불이 옮겨붙으면서 맨몸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며 “대피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마을 인근 다리에 한동안 고립됐다가, 불길이 지나간 뒤에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용찬(69)씨는 “호흡기 질환이 있어서 병원 치료를 받던 중 집이 불에 타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며 “몸도 아픈데 언제까지 임시숙소에서 생활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걱정했다.
28일 오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임하1리에서 만난 한 주민이 산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모습. 박진호 기자


토마토·애호박·과수 등 농작물 피해


시설채소 등 농작물 피해도 컸다. 이날 마을 앞에서는 황모(61)씨가 불에 탄 비닐하우스를 망연자실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황씨는 토마토와 애호박을 키우는 비닐하우스 8동 중 7동이 산불에 망가졌다. 비닐하우스 온도를 유지하는 커튼과 전기온풍기, 기름보일러 등 전기장비와 하우스마다 비치했던 트랙터 등 농기계가 다 탔다.

황씨는 “심지어 물 뜨는 바가지 하나 건지지 못했다”며 “마을엔 전기가 들어왔는데 아직 농사용 전기는 복구가 되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일영(57)씨는 “4000평(1만3200㎡) 땅에 기르던 자두나무가 몽땅 탔다”고 하소연했다. 한 주민은 “최근 파종을 마친 옥수수밭이 불에 탔다”고 울먹였다.

임하1리 주민들은 이번 산불로 주택 40여 채가 전소하고, 10여 채가 무너지는 등 피해를 본 것으로 자체 집계했다. 유창규(68) 이장은 “산불이 태울 것은 다 태우고 지나갔다”며 “산불 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정확한 농작물 피해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출향인들로부터 이불과 담요·전기매트 같은 구호 물품을 전달받을 예정이지만, 임시숙소에서 머물기엔 고령자가 많아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안동=최종권·박진호 기자 choi.jong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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