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브수다] "바둑 몰라도 보인다"…'승부', 김형주 감독의 5가지 묘수

김지혜 2025. 3. 27.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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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바둑에서 '복기'를 가장 좋아합니다. 어떤 스포츠도 승자와 패자가 끝난 경기를 처음부터 되새기며 '이건 좋았고, 저건 나빴고'를 복기하지 않잖아요. 멋진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승부'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은 바둑이라는 한 판 승부에 있어 가장 좋아하는 과정으로 '복기'(復棋: 바둑, 장기, 체스 등의 대국이 끝난 뒤, 해당 대국의 내용을 검토하기 위하여 두었던 순서대로 다시 두어보는 일)를 꼽았다.

일반적으로 한 편의 영화가 완성돼 관객과 만나기까지는 길어야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승부'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시간인 4년이 걸렸다.

'승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바둑 레전드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대결이라는 드라마틱한 소재, 이병헌과 유아인이라는 최고 배우의 캐스팅으로 인해 제작 단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촬영을 마치고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히며 긴 방황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영화의 수장인 감독이었다. 4년의 긴 기다림 끝에 관객과 만나게 된 만큼 개봉까지의 과정을 스스로 복기해 봤을 터. 인터뷰에서 만난 김형주 감독은 지난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터널 속 한 줄기 빛이었다"는 표현으로 개봉의 안도감을 설명했고, "많은 관객과 만나길 바란다"며 흥행에 대한 바람을 드러냈다.

영화 '승부'의 제작부터 개봉까지, 영화를 살린 5가지 묘수(妙手)를 감독의 입으로 들어봤다.

◆ 착수: "조훈현, 이창호의 사제 대결 어때요?"

김형주 감독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 영화 '보안관'(2017)으로 데뷔했다. 전국 258만 명을 동원하며 준수한 신고식을 치렀던 김형주 감독은 차기작으로 데뷔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승부'를 선택했다. 그가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게 된 건 영화사 월광의 대표이자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동문인 윤종빈 감독 부부 덕분이다. 김형주 감독은 윤종빈 감독의 아내이자 대학 후배인 문선영 씨로부터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을 영화로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조훈현, 이창호 사제 대결을 영화 아이템으로 제안해 줬다. 제작자인 윤종빈 감독은 당시 '수리남'을 찍고 있어서 먼저 각본을 쓰기 위한 자료 조사에 돌입했다. 조사를 해보니 드라마틱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감정이 살아있는 이야기라 흥미로웠다. 바둑뿐만 아니라 여러 가치를 담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 같았다. 또한 시대(1980~1990년대)의 낭만도 잘 담아내고 싶었다."

두 국수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당대 언론과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대결이었다. 특히 개인에게 뼈아픈 기억일 수 있는 만큼 조훈현 국수에게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터. 김형주 감독은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충무로에 떠도는 말론 두 국수에게 과거에도 여러 번 영화화 제안을 했는데 번번이 거절했다더라.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 조국수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해서인지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침체된 바둑계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으신 것 같았다. '바둑의 승부는 격투기처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경기인데 이걸 영화로 표현하기 어려울 텐데'라고 하시면서도 잘 해보라고 하셨다. 다만 바둑돌을 짚고 놓는 기본적인 부분이라던가, 바둑을 대하는 배우들의 자세에도 진정성을 보여달라고 당부하셨다. 이창호 국수는 우리가 영화에서 표현한 것 이상으로 말씀이 없으셨다. 그야말로 '돌부처'였다. 스승님이 이미 허락하셨다고 하니 그분도 따르신 것 같았다. 만남 자체를 너무 불편해하셔서 빨리 보내드렸다.(웃음)"

'승부'는 이병헌과 유아인의 캐스팅만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전혀 다른 이미지와 스타일을 가진 두 배우가 한 영화에서도 만난 것이 흥미로웠고, 연기력은 물론 외형까지 실존 인물과 흡사하게 재현해 낸 것도 놀라웠다.

"이병헌 배우가 먼저 캐스팅이 된 단계에서 이창호 역 캐스팅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아우라에 눌리지 않는 배우, 외모부터 연기방식까지 서로 다름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유아인 배우를 캐스팅했다. 촬영할 때는 매 순간, 너무 좋았다. 첫 테스트 촬영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촬영장에 가벽 하나 세워두고 바둑판 하나 놓고 쇼파에 앉아 두 사람이 합을 맞췄다. 그 시대, 그분들의 헤어 분장을 한 두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근사했다. 그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랄까."

◆ 검토: 영화적 허용과 실제 승부 사이

김형주 감독은 '승부'를 만나게 될 대다수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바둑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의 각본을 써야 했기에 한 동안 바둑에 파고들기도 했다. 그러나 단 몇 달 만에 통달하기는 불가능했다.

"바둑 기초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는데 '이거 어느 세월에 익히겠나' 싶더라. 어차피 프로바둑기사님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니 전문가들에게 맡기자는 생각이었다. 촬영이 4~5개월 남은 시점에 프리 프로덕션을 시작한 터라 영화 작업에 집중했다."

오히려 그가 바둑에 문외한이라는 것이 대다수 관객의 눈높이를 조준하는 데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바둑을 몰라도 영화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대본을 쓰고 콘티를 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와 '전혀 못 따라오면 어쩌지'하는 고민이 계속됐다. 그 무렵 공개된 체스 소재의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을 보고 안도했다고 했다.

"'퀸스 갬빗'도 체스의 룰을 전혀 모르고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영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만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몇 차례 모니터 시사를 했는데, 바둑 용어나 승부 상황에 대한 안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이 많았다. 예비 관객의 의견을 반영해 승부 상황을 보여주는 바둑 용어와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바둑 용어의 의미를 자막을 통해 설명했다."

실제 승부의 고증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형주 감독은 "바둑 그 자체가 중심인 영화는 아니지만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허투루 다룰 수 없었다. 주요 승부는 기보에 맞게 작성했다. 영화의 메인 대국은 그 당시 기보를 순서대로 재현했다. 이창호 혼자서 여러 사람과 동시에 바둑을 두는 다면기(多面棋)에서도 모든 대국을 도움을 받았다. 카메라 앵글에 보이지 않는 장면까지 전문가분이 기보를 작성해 주셨다. 새 기보를 촬영할 때는 영화의 맥락에 맞는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는데 전문가분과는 이견이 좀 있기도 했다. 대사에 맞는 후보군을 선별해 어떤 수가 정확한지를 토론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다. '이 수는 뒤가 없이 공격하는 느낌입니다' 이런 식의 디렉션을 주고, 프로 바둑 기사에게 수의 의미를 물어보고 그걸 실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는 계속해서 검토하고 고민했던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나온 상황을 배우에게 디렉션하는 건 또 다른 측면이었다. 마지막 대국은 두 배우가 세트장에서 바둑 두는 것만 3~4회 촬영했다."고 전했다.

◆ 신의 한 수: 지는 게임으로 이기는 서사 만들기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제 대결이 핵심인 영화다. 두 배우가 양축을 형성하고 있지만 엄연히 따지면 스승 조훈현의 이야기다. 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인물이 자신이 키운 제자에게 패하고 좌절한 뒤 다시 일어서는 서사다. 감독으로서는 두 캐릭터의 균형을 잘 잡으면서, 조훈현의 드라마틱한 서사에 힘을 싣는 게 중요했다.

"이창호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형적인 천재 스토리로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조훈현 캐릭터에 무게추가 실릴 수밖에 없다. 사제지간의 대결에서 스승이 패하고, 제자가 이기면서 둘 다 힘든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스승이 그걸 극복하고 다시 정상에 도전한다. 일반적으로 정상을 지키다가 바닥을 치면 뒤안길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조훈현 국수는 그 난관을 극복해냈다. 그 스토리에 매료돼 영화의 방향을 잡았다. 이창호의 성장이라는 맥락도 있지만, 처음으로 스승의 역할을 하는 조훈현의 판단 착오와 실수 그리고 성장의 다층적인 레이어가 중요했다."

드라마틱한 실화지만, 영화적 재미를 강화하기 위해 실제 사건과는 타임라인을 다르게 짰다. 이를테면 조훈현이 실제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것은 세계대회(1989년 응씨배)에 우승하기 전(1984년)이었다. 또한 영화에서는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첫 대결에서 바로 패한 것처럼 연출했는데, 실제로는 앞서 두 번의 대결이 있었고, 이창호는 세 번째 대결(1990년 2월 29기 최고위전)에서야 스승을 이겼다.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첫 대결인 것처럼 구성했다는 것이 감독의 변이다.

이 과정에서 조훈현의 심리 상태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이병헌의 탁월한 연기의 힘이 컸다. 이병헌은 스승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에게 패하며 느꼈을 분노와 좌절, 질투와 무력감을 세밀한 감정연기로 표현해냈다. 김형주 감독이 이병헌을 택한 이유기기도 했다.

◆ 곤마: 배우 리스크두 번의 배급사 변경

영화 한 편이 완성돼 관객에게 가닿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을 거친다. 영화는 그 영화만의 운명이 있다고는 하지만 '승부'는 관객과 만나기까지 유독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극장용 영화로 기획됐던 '승부'는 2022년 10월 넷플릭스와 계약하며 OTT 행 열차를 탔다. 코로나19로 극장 산업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넷플릭스가 제안한 조건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말 배우 유아인의 마약 투약 혐의가 불거지며 크나큰 암초를 만났다. 결국 넷플릭스가 발을 빼면서 '승부'는 미아가 됐다. 이후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와 손을 잡고 다시 극장 개봉을 준비했지만, 해당 배급사가 영화 사업을 접으며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당시를 회상한 김형주 감독은 "지옥 같은 터널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막막했다"라고 말했다. 유아인에 대해서는 "주연 배우로서 무책임할 수도 있고, 실망스러울 수 있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배우이기 이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고 쓴소리를 내기도 했다.

◆ 타개: 위기에서 답을 찾다

영화 '소방관'으로 한국 영화 배급 사업을 시작한 바이포엠 스튜디오가 '승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래 계획대로 극장에서 관객과 만나게 된 김형주 감독은 '깜깜한 터널 속 발견한 한 줄기 빛'이라는 말로 개봉의 감격을 전했다.

"우리 작품이 엄청 상업적인 이야기라거나 자극적인 소재는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배우, 최고의 스태프와 함께 완성한 결과물이라는 자신감은 있다. 일부 기사에선 '창고 영화'라는 표현도 하지만 트렌드를 타는 영화가 아니고, 휘발하지 않은 이야기라는 확신도 있다"

'유아인 리스크'가 영화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만큼 감독으로서 고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이 핵심인 영화에서 이창호를 연기한 유아인의 분량을 편집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형주 감독은 초기 편집본대로 밀고 나갔다. 이야기의 구조와 흐름을 지켜 영화 본연의 재미와 가치로 관객에게 평가받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마지막 대국장에 들어가는 엔딩 시퀀스를 가장 좋아한다. '창호, 또 너냐 도리 없지'라는 조훈현 국수의 말은 오랜 사제 대결을 압축하는 것과 동시에 둘 다 계속 승부사로서 앞날을 헤쳐가겠다는 정서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라 좋다. 실제로 그 대국을 1박 2일 동안 지켜본 월간 바둑 기자의 관전기 기사에서 따왔다. 이건 무조건 엔딩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우리 모두 일상이라는 바둑판을 매일 매일 마주하면서 살아가지 않나.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지만, 어떤 길과 선택에도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둑을 두듯 인생을 살아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기획부터 촬영, 후반작업, 개봉에 이르기까지의 긴 시간을 복기하며 그는 "돌고 돌아온 끝에 관객을 만나게 됐다. 그동안의 우여곡절은 다 차치하고 극장에서 개봉할 수 있어 기쁘다. 인생이 늘 좋을 순 없다. 버티고 버티다 보니 이런 기쁨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정신력도 한층 강해진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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