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절정이 맛과 향으로 팡팡
봄나물의 계절이 왔다. 나는 제철 나물이 될 식물들을 만나고 맛볼 생각에 파릇파릇 새순처럼 들뜬다. 낮의 길이가 밤의 길이를 추월하는 춘분을 기점으로 양지를 골라가며 각종 새순이 돋는다. 민가 주변에선 냉이와 달래와 쑥이 대체로 먼저 나온다. 좀더 깊은 골짜기로 가면 지장나물로 불리는 풀솜대와 얼룩취로 불리는 얼레지가, 그리고 바닷가 주변에는 이름이 좀 낯선 봄나물 전호가 있다.
겨울 해풍을 맞고 크는 나물
전호나물은 우리나라 전역에 야생한다. 특히 동해안에 있는 울릉도와 남서해안에 있는 섬에서 대규모 군락을 이루며 크게 번성해서 산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호는 거의 전 대륙에 걸쳐 분포하며 산림, 초원, 도시, 정원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자기 영역을 만들 수 있다.
다른 나물이 사라지는 늦가을에 전호는 잎을 펼쳐 뿌리와 줄기를 더욱 굵게 만들고, 초록을 유지한 채 겨울을 난다. 그러고선 이른 봄에 보드라운 새잎을 누구보다 빨리 낸다. 말 그대로 겨울 해풍을 맞고 크는 나물이 전호다. 산나물로 큰 수입을 얻는 울릉도에서 다른 산채보다도 전호나물을 대량으로 재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울릉도가 고향인 수목원 동료에게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삼나물, 명이나물, 부지깽이나물, 고비… 각종 산나물을 그렇게 많이 팔아도 전호나물 파는 곳을 요즘 통 못 봤어요. 사람들이 덜 찾나요?”
전호나물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그럴 거라고 했다. 건나물이나 장아찌로 계절 구분 없이 가공하고 포장해서 팔 수 있는 식물과 달리 전호는 싱싱한 상태로만 쓰기 때문에 다른 나물에 밀린다는 것이다. 나물 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으로 야생에서 구하는 귀한 산채가 전호라는 귀띔도 했다. 최근 내륙과 서해안 일부 섬의 임가와 농가에서 그 가치를 다시 알고 전호나물을 대량으로 재배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전호는 미나리와 같은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이며 잎의 생김새도 미나리와 비슷하다. 미나리처럼 아삭한 식감과 특유의 향도 지녔다. 그 향은 산형과 가계의 여러 자매 식물, 이를테면 미나리와 지중해 허브 식물 ‘처빌’과 한약재 ‘당귀’를 두루 섞어놓은 향 같다.
뭔가 모호하면서도 끌리는 그 향을 음미하려 만들어 먹는 나만의 전호나물 샐러드가 있다. 전호나물 한 움큼을 깨끗이 씻어 한입 크기로 썬 다음 현미유 한두 바퀴 두르고 소금 살짝 뿌려 삶은 달걀 한 알 썰어 얹으면 끝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향기와 식감과 영양을 두루 갖췄다는 점에서 일품 봄 채소다. 쌈 채소로 먹거나 전을 부쳐 먹어도 전호나물 향을 즐기기 좋다. 살짝 데쳐 들기름, 다진 마늘, 깨소금에 간장 쪼록 떨궈 무치고 통깨 솔솔 뿌려 밥반찬으로 먹으면 꿀맛이다. 한입 두입 먹다보면 반대로 나물 무친 큰 그릇에 공깃밥을 부어 야무지게 비벼서 싹싹 긁어 먹게 된다. 그야말로 봄의 절정을 내 안으로 한가득 밀어 넣는 맛이다.
전호 향내 입안에서 사방팔방 터지는 순간
중국 식당에서 먹었던 전호 딤섬은 정말 맛있었다. 2024년 봄에 미국 시애틀로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렀다. 여러 종류의 딤섬이 메뉴판에 나열된 걸 훑어보다가 전호를 뜻하는 중국식 한자 ‘아삼’(峨蔘)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알아본 내가 무척 기특했다. 고민할 것 없이 ‘아삼딤섬’을 시켰다. 내 선택은 탁월했다. 딤섬의 얇은 피 안에서 여러 채소와 어울려 가만히 소로 웅크리고 있던 전호가 내 입안에서 특유의 향내를 사뿐히 풍기며 사방팔방으로 터지던 순간의 감각은 아직도 혀 위에 또렷하다. 후후 불면서 코를 박고 먹다가 고개를 드니 식당 창밖에선 가로등 아래로 시애틀의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전호를 나물로 즐겨 먹는다. 일본 사람들은 전호 뿌리가 인삼을 닮았다고 산에서 자라는 인삼이라는 뜻에서 ‘야마닌진’(山人参)이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인삼을 닮았다고 하는 그 뿌리는 실제로 약이 된다. 허약한 몸을 다독일 때, 독감이 들어 기침이 날 때, 부종 따위를 다스릴 때 적어도 3년 이상 키운 전호의 뿌리를 늦가을이나 초봄에 캐서 강장제로 쓴다고 들었다.
전호의 영어 이름은 ‘카우 파슬리’(Cow Parsley)다. 잎과 줄기와 씨앗과 뿌리 어느 부위 가리지 않고 먹는다. 숭숭 썬 생채는 샐러드나 페스토가 되고, 냄비에 넣고 끓이면 수프나 스튜에 풍미를 더하는 허브가 된다. 씨앗을 갈아서 카레나 밥 위에 향신료처럼 뿌려 먹기도 한다. 뿌리는 당근 대용으로 쓸 수 있다. 서양의 전통 의학에서 전호는 소화기 장애, 호흡 곤란, 감기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고 모기 퇴치제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아름다운 것은 독이 있다고 했던가. 야생에서 전호를 함부로 캐는 일은 정말 주의해야 한다.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유독한 식물 유럽독미나리 또는 나도독미나리와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둘 다 어린잎이 전호와 닮았다. 어느 정도 자라면 구분이 된다. 유럽독미나리는 전호보다 잎이 훨씬 잘게 갈라져서 쉽게 구분할 수 있고 나도독미나리는 전호와 달리 줄기 전체에 붉은 얼룩이 있다. 유럽 원산의 그 두 독초는 우리나라에도 도입돼 야생에서 전호와 섞여 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그들뿐만 아니라 약간의 독성을 지닌 자주괴불주머니 어린잎도 전호와 비슷한 생김새로 전호나물 주변에 있으니 섣불리 채취를 시도해서는 안 된다.
오월부터 유월 사이 깃털 모양의 초록 잎을 배경으로 하얀 거품이 피어오르듯이 전호는 꽃을 퍼뜨린다. 전호 혈통을 뜻하는 ‘산형’(繖形)과는 그들 꽃이 한자 그대로 우산 모양으로 생겼다는 뜻이다. 소화경(작은 꽃차례)에 해당하는 우산살이 적게는 다섯 개부터 많게는 열 개 이상 모여 그 끝마다 안개꽃 같은 자잘한 꽃을 매단다. 작은 꽃 한송이 한송이의 꽃잎은 다섯 장인데 가장 바깥 하나가 특히 크다. 수술만 있는 수꽃과 암술과 수술이 다 있는 양성화가 섞여 있는데 워낙 작아서 루페(식물 확대경)를 갖다 대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 작은 꽃 수백 개가 모여 꽃차례 하나가 된다. 꽃 핀 전호는 꿀벌과 꽃등에와 갈구리나비와 같은 곤충을 부른다.
‘숙녀의 레이스’를 캐면 ‘엄마가 죽어요’
영국 사람들은 ‘오월 정원에는 장미, 오월 들판에는 전호’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향의 들꽃으로 전호를 맨 먼저 손꼽는다 한다. 빅토리아 시대에 전호는 ‘순수’ ‘보호’ ‘봄의 전령’ 등과 같은 꽃말로 인기를 얻었다. 영국에서는 그래서 전호의 애칭도 여러 개다. 앤 여왕 시대 즐겨 입었던 섬세한 레이스를 닮은 꽃이라는 뜻에서 ‘숙녀의 레이스’(Lady's Lace) 또는 ‘앤 여왕의 레이스’(Queen Anne's Lace)라 불린다. 기침을 달고 살던 여왕이 신선한 공기를 쐬기 위해 부러 시골길을 산책할 때 무성하게 자란 전호를 보고 위로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한 애칭과는 반대로 ‘엄마가 죽어요’(Mother-die)라는 으스스한 별명이 있다. 전호와 독초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전호를 캐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한다. 한 포기의 전호는 수백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의 씨앗을 맺을 수 있고 생육 조건만 맞으면 빠르게 퍼져 군락을 이룰 수 있다. 전호가 ‘강아지의 번성’(Dog's Flourish)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유다.
플로리스트가 사랑하는 절화용 식물 가운데 하나가 전호일 것이다. 가녀린 꽃차례가 산들대는 모양과 수수한 들꽃의 매력과 전원풍의 자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전호는 드레스에 어울리는 부케 소재가 되거나 정원 파티를 장식할 때 애용된다. 영국 왕립원예협회는 최근 한 정원 박람회에서 전호를 극찬한 바 있다. 산사나무 아래 심어 마치 레이스 장식처럼 보이게 하거나 1m를 훌쩍 넘게 자라는 특징을 살려 울타리용으로 가꾸어도 좋을 거라며.
나는 전호 꽃이 보고 싶을 때 산과 들에 핀 전호를 찾아가서 보고 온다. 꽃병에 꽂아 감상하고 싶으면 꽃집에 가서 산다. 서양에서 수입한 전호 원예 품종을 국내 꽃집은 안스리스쿠스라는 이름으로 판다. 안스리스쿠스는 전호의 생물학적 이름인 학명의 속명(俗名)이다. 사실 나는 전호의 분류학적 명칭 등을 따져 묻는 것보다 전호라는 생명체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걸 더욱 즐긴다. 그건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영향 때문일 거다.
회잎나무 겨울눈에서 뾰족 솟은 연두색 순을 할머니는 홑잎나물이라 불렀다. 숲속에 사는 나무 중에 새순이 가장 빠른 편이다. 이맘때 우리 할머니는 회잎나무 새순을, 그중에서도 가장 선명하고 깨끗한 것만을 고르고 골라 키버들 가지로 엮은 바구니에 가지런히 모았다. 살짝 데쳐 정성껏 무쳤다. 그이의 어깨너머 가르침 덕분에 나는 일찍부터 웬만한 봄나물은 익힐 수 있었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하며 그러한 무리의 식물들을 학술적으로 더욱 깊이 탐구하게 됐는데, 어찌 보면 식물 그 자체의 매력을 탐닉하고 나물로서의 조리법을 궁리하는 데 열의가 있었던 것도 같다.
세상이 수상해도 새순은 돋아나
홑잎나물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봄나물을 장만해서 식목일 무렵 할머니는 도시락을 쌌다. 어린 나와 언니를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 도착한 곳은 할아버지 산소였다. 겨우내 잘 지내셨냐고 손주들 데리고 왔다며 할머니는 봉분 앞에 도시락을 펼쳐 놓으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예를 갖추고 나서 둘러보면 무덤가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진달래꽃을 따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화전을 부쳐 먹었다. 마당에 모란과 옥매와 죽단화 같은 꽃나무를 심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자매에게 절기 한식을 알려준 거겠지. 그이의 가르침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에서 더욱 또렷해진다.
세상이 수상해도 정직하게 돋은 새순을 보며 봄이 온 걸 실감한다. 아름다운 봄을 모쪼록 모두가 누렸으면 좋겠다. 봄은 길지 않으니까.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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