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탄처럼 불덩이 쏟아져”… 주민 구하려던 이장 부부 불길 갇혀

의성=명민준 기자 2025. 3. 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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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산불’ 확산]
전쟁터 방불 산불현장, 잇단 참변
노인들 태운 요양원車 화염에 폭발… 거동 힘든 70, 80대 집안-마당서 숨져
“조금만 빨리 도착했어도” 아들 눈물… 발견 못한 사망자들 더 있을 수도
산등성이 따라 마을로 번지는 산불 26일 오후 경북 의성군 안평면 창길리 야산의 산불이 산등성이를 따라 마을을 향해 번지고 있다. 22일 오후 11시 25분경 의성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은 강풍을 타고 청송과 영양, 영덕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의성=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25일 오후 8시 반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산을 태우던 불길이 불과 15분 만에 중턱에 있는 요양원까지 내려왔다. 불길을 피해 즉시 떠나라는 대피령이 떨어졌다. 입소자 대부분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라 차 없이는 대피가 불가능했다. 오후 9시경 정모 할머니(80) 등 입소자 4명과 요양원 여성 직원 2명이 탄 차가 요양원을 빠져나갈 때 주변은 이미 화마가 삼키고 있었다. 정 할머니 일행이 탄 차는 10분도 못 가 달려든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불이 도로를 달군 탓에 타이어가 녹아 먼저 터졌고 이후 차가 폭발했다. 정 할머니 등 3명이 숨졌고 나머지 탑승자 3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들보다 앞서 요양원을 출발해 인근 교회로 필사적으로 대피해 목숨을 건진 입소자들은 정 할머니 일행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 “산불이 방사포처럼 마을로 쏟아져”

25, 26일 이틀간 21명의 목숨을 앗아간 경북 북동부 산불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25일 오후 6시 경북 영양군 석보면 화매2리 오원인 이장(57)은 마을 뒷산에서 밀려오는 화염을 보고 경악했다. 경북 의성에서 번진 불이 안동을 거쳐 영양까지 덮쳤다. 불길은 산과 바람을 타고 무서운 속도로 다가왔다. 불과 5분 전 “빨리 주민들을 대피시켜 달라”는 군청의 연락을 받은 오 이장은 다급하게 움직였고, 이내 주민들의 휴대전화에는 “즉시 대피하라”는 오 이장의 스마트 음성 메시지가 속속 도착했다. 한 주민은 “이장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집을 뛰쳐나왔더니 마당에 불이 붙고 있었다”고 말했다. 50대 주민 김모 씨는 “불이 그냥 천천히 번지는 게 아니라 뉴스에서나 봤던 북한 방사포처럼 불꽃 수천 개가 미사일처럼 마을로 쏟아졌다”고 말했다. 이후 마을 전기와 통신망도 끊겼다.

같은 시간 옆 마을 석보면 삼의리 권모 이장(64)도 아내 우모 씨(59)와 함께 다급하게 차에 올랐다. 마을 도로는 이미 여기저기 날리는 불씨와 검은 연기 탓에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도로 옆의 낙엽이 땔감 역할을 하며 타오르자 마치 도로는 용암이 흘러드는 것 같았다. 권 이장 부부는 인근에 사는 친척들과 연락이 두절됐다.

오후 8시경 권 이장의 동생이 형의 행방을 찾아 나섰을 때는 이미 늦었다. 권 이장의 차는 도로변 배수로에 고꾸라져 검게 탄 채 발견됐다. 차가 향하던 방향은 대피소가 아니라 삼의리 쪽이었다. 평소 권 이장과 친하게 지냈다는 오 이장은 “아마 다른 마을 주민들을 구하러 가다가 불길에 휩싸인 것으로 보인다”며 슬퍼했다.

● 희생자 대부분 거동 어려운 노인

대피하던 車에 화염 덮쳐 3명 사망 26일 경북 영덕군 매정리의 한 도로에서 승용차가 불에 타 뼈대만 남아 있다. 경찰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인근 요양원 직원과 입소자들이 차를 타고 산불을 피해 대피하던 중 화염으로 차량이 폭발했다. 이 사고로 차량 탑승자 6명 중 3명이 숨졌다. 영덕=뉴스1
이번 화마에 스러진 희생자 상당수는 거동이 어려운 노약자였다. 대부분 70, 80대로 집 안이나 마당, 도로 위 불탄 차 안에서 발견됐다.

영덕읍 매정리에서는 80대 노부부가 집 앞에서 불과 1분 거리의 내리막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불을 피해 집을 나섰지만 거동이 불편해 결국 불길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장손 이모 씨(30)는 “산불이 난 뒤 교통도 통제돼 동네가 무질서 그 자체였다”면서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다면 살릴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 모두가 자책하고 있다”며 눈물을 훔쳤다.

안동시 임하면 신덕리 이덕마을에서는 지체장애인 안모 씨(75)가 집을 나서지 못하고 불길에 숨졌다. 그는 요양보호사 도움 없이는 밖에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처지였다. 연락을 받고 조카가 안 씨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찾아갔으나 이미 숨진 뒤였다. 이웃 주민은 “대피 연락을 받았어도 움직일 수가 없어 갇혀 있었을 것”이라며 “그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인접한 임하면 임하1리에서는 80대 권모 씨(85) 부부가 화재로 무너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권 씨의 시신이 먼저 발견됐고 아내 김모 씨(87)는 현장에서 찾을 수 없었다. 자녀들은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굴착기를 동원해 집을 수색했다. 무너진 잔해에서 김 씨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다.

영덕군 축산면 대곡리에서도 80대 남성이 산불로 무너진 자택에 매몰돼 숨졌다. 청송군 파천면과 진보면에서는 각각 80대 여성과 70대 남성이 집 안과 마당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북소방본부 관계자는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대피를 준비하거나 대피 중에 급속도로 번진 불길의 피해를 입으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산불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앞으로도 집 안이나 주변에서 숨진 채 뒤늦게 발견되는 희생자들이 늘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의성=명민준 기자 mmj86@donga.com
영양=이수연 기자 lotus@donga.com
영덕=천종현 기자 punch@donga.com
안동=조승연 기자 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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