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만 있고 예산은 없는 자살예방 정책
128년 전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사회학의 고전이 된 저서 〈자살론〉에 이렇게 적었다. “개인은 작은 충격에도 무너진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를 그러한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고서라도, 어쩌면 대한민국은 그의 연구를 가장 잘 뒷받침하는 증거일 수도 있다. 2008년 전 세계를 휩쓸었던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는 3년 뒤인 2011년 1만5906명이라는 역대 최고 자살 사망자 수로 나타났다. 하루 평균 4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10대부터 30대까지 사망 원인 1위가 질병이나 사고가 아닌 자살이었다. 2004년부터 5년 단위로 자살예방 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을 세워왔던 정부는 하루 평균 43명이라는 충격적인 수치가 발표되자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해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이 통과됐다.
그러나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13년 뒤인 2024년, 바로 지난해에는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자살 사망자 수(잠정 집계)가 나왔다. 1만4439명. 하루 평균 3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난 뒤 지속된 경기 불황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만 선뜻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정부는 5년마다 기본계획을 세우고 있고, 2011년 이후 자살예방법에 따라 여러 정책을 펴고 있으며, 많은 지자체에서도 자살 예방 관련 조례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자살로 인한 사망은 오히려 늘었을까?
실제로 2024년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실린 논문 ‘자살예방정책 시행 후 자살률 추세 변화: 제5차 자살예방 기본계획에 대한 단절적 시계열 연구’에 따르면 제5차 기본계획(2023~2027년) 초기 동안 기존 추세 대비 월평균 100명 이상의 초과 자살이 발생했다. 이 논문은 “그간 일반인의 인식 개선과 자살예방법 개정으로 자살 시도자 연계 활성화가 이루어진 데 비해 자살 위기에 대응하고 자살 위험군을 관리하는 기관과 인력에 대한 재정 투자는 적정하게 증가하지 않아 자살률 감소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목표만 앞서갈 뿐 이를 실현시킬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논문의 저자 중 한 명이자 2006년부터 광주 북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성완 전남대학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지난해 가을부터 자살률이 심각하다는 걸 체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청년들, 학생들의 비율이 높았다. 그래서 올해부터 전남대학교 학내 보건진료소장도 정신과에서 맡게 됐다. 여기에 더해 정신과 전문의 한 명이 풀타임으로 학생 상담만 하기로 했다. 문제가 있다면 투자를 해서 바꿔야 한다.”
한국정신건강복지센터협회 회장이기도 한 김성완 교수는 지금까지 국가의 자살 예방 정책을 “던져놓고 돌아보지 않는” 구호에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2023년에 발표한 5차 기본계획에서 정부는 자살률을 30% 줄이겠다고 했다. 좋은 목표다. 그런데 어떻게? 30% 감소를 위해 예산은 몇 퍼센트 증액해야 하는지 막상 그 계산이 빠져 있다.”
“더하기만 아는 이상한 계산기”
예산은 제자리걸음인데 목표치가 높아지면 일선 업무 강도가 올라간다. 그 하중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게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와 자살예방센터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에서 11년째 근무하고 있는 보건의료노조 서울시정신보건지부 지부장 주상현씨는 내담자가 전화기 너머로 “당신이 뭘 해줄 수 있는지” 물어올 때마다 무력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빚 때문에 집에서 쫓겨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면 상담사는 ‘긴급지원을 받아보라’고 안내한다. 그런데 절차는 까다롭고 조건도 많다. 내일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 승용차 하나 있다고 지원 대상에서 탈락되는 식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쉼터가 필요하고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고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 나눌 시간이 필요한데, 딱딱 정해진 센터 예산으로는 할 수 없는 활동들이다.”
대부분 민간 위탁으로 운영되는 센터에 소속된 직원들은 계약직이 대다수이며, 처우도 열악하다. 2020년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기초정신건강복지센터별 운영 형태 및 상근인력 현황’ 자료를 보면, 전국 정신건강복지센터 상근 인력 3224명 중 2276명(70.6%)이 비정규직이고 평균 근속연수는 3.3년에 불과했다. 센터를 찾아오는 내담자로서는 담당자가 자주 바뀌면 안정감을 느끼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다른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일하는 3년 차 정신건강사회복지사는 현재 정부의 자살 예방 정책을 “더하기만 알고 나누기는 모르는 이상한 계산기”라고 표현했다. “우리 센터에서 한 명이 최소 30건을 맡는다. 사례관리만 하는 게 아니라 위기 개입도 해야 하고 아동청소년 상담, 중독 예방, 자살 유족 사업 등등 이슈가 되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은 계속 더해지는데 인력은 늘지 않는다.” 2022년 12월 국립정신건강센터 통계상 근무자 1인당 평균 25.2명을 담당한다. 지자체별로 최저 17.1명에서 최고 45.1명에 이른다.
과거 정부 정책을 ‘백화점식’에 비유하곤 했던 주상현 지부장 역시 이제 백화점도 아닌 ‘다이소식’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선에서 느끼기에 2024년 7월 윤석열 정부가 전격적으로 밀어붙인 ‘전 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도 그런 정책 중 하나다. 심리 상담이 필요한 국민에게 심리 상담 서비스 바우처를 제공하는 사업인데, 2025년 383억원에 달하는 예산이 배정됐다. 자살 예방 사업 예산이 562억원인 점과 비교하면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한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빠듯한 예산인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중증 정신질환자나 자살 고위험군에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했다. 처음에 이 사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복지부에 ‘꼭 해야 하는 사업이냐’고 문의했더니 ‘그건 논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답을 들었다. 복지부에서 결정한 게 아니라 위에서 정한 거다.” 전 국민 마음투자 지원 사업은 김건희씨의 의지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상현 지부장은 ‘위’가 아니라 구청장의 지시에 따라서도 왔다 갔다 변하는 게 정신건강 사업과 자살 예방 사업이라고 말했다. “정부 바뀌면, 복지부 장관 바뀌면, 담당 과장 바뀌면 그냥 반성 없이 계속 적어낸다. 기본계획도, 지역 조례도 마찬가지다. 다 알면서도 그거 쓰느라 매달리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 짠하다.” 계획도, 법도, 조례도 있는데 예산과 인력은 없는 간극 속에서 ‘OECD 자살률 1위’라는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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