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달걀 외교’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5. 3. 23.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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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전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이 외무부 의전실장으로 일하던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하루는 이범석이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 대사, 찰스 본스틸 주한미군 사령관을 자신의 주말 농장으로 초청해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이에 한국은 최근 충남 아산의 한 농장에서 생산된 달걀 20t을 미국에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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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전 외무부(현 외교부) 장관이 외무부 의전실장으로 일하던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하루는 이범석이 윌리엄 포터 주한 미국 대사, 찰스 본스틸 주한미군 사령관을 자신의 주말 농장으로 초청해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농장에서 키우는 닭 울음소리를 들은 본스틸 사령관이 “날마다 신선한 계란을 먹을 수 있어 좋겠다”며 부러움을 표시했다. 당시만 해도 주한미군은 계란 등 주요 식자재를 외국에서 공수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범석은 즉석에서 대사 관저와 사령관 관사에 날마다 싱싱한 달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바로 다음 날부터 실행에 옮겨져 대사와 사령관을 기쁘게 만들었으니, 별 것 아닌 계란으로 미국 요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범석의 외교력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하겠다.

미국에서 조류인플루엔자(AI) 유행에 따른 닭 살처분 증가로 계란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계란은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식자재다. 특히 미국인들의 계란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다. 미국의 국민 1인당 연간 계란 소비량은 약 287개로 한국(270개)보다 훨씬 많다. 자연히 미군 병사의 아침 식사 식단에는 스크램블, 프라이 등 달걀 요리가 늘 포함된다. 오죽하면 고참병이 아직 제 앞길 못 가리는 신병들 앞에서 “내가 군에 입대해서 지금까지 먹은 계란이 몇 개인데…”라는 말로 폼을 잡겠는가.

그 미국에서 요즘 ‘계란 대란’이 벌어졌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조류인플루엔자(AI) 유행이 시작된 뒤 병에 걸렸거나 AI가 의심되는 닭들을 닥치는 대로 살처분한 결과다. 닭이 없으니 자연히 달걀도 귀해져 요즘 12개 들이 계란 한판 가격은 6.5달러(약 9500원)로 치솟았다. 식당에서 파는 음식 중 계란이 들어간 요리 가격이 껑충 뛴 것은 물론이다. 오죽하면 계란(에그)과 물가 상승(인플레이션)을 더한 ‘에그플레이션’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겠는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무능한 바이든 행정부’ 탓으로 돌리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처럼 항변하지만, 취임 후 벌써 2개월이 지난 마당에 미국인들이 언제까지 그 말을 믿을 것인지 의문이다.

브룩 롤린스 미국 농무부 장관이 21일(현지시간) 치솟는 계란 가격을 주제로 AP 통신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롤린스 장관은 한국, 튀르키예 등에서 더 많은 달걀을 수입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방송 화면 캡처
다급해진 미 행정부는 급한 대로 외국에서 계란을 수입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한국, 튀르키예, 덴마크 등을 지목해 계란 수출을 요청했다. 이에 한국은 최근 충남 아산의 한 농장에서 생산된 달걀 20t을 미국에 판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과 튀르키예는 추가 물량 공급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가운데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은 계란 수요가 급증하는 부활절(4월20일)을 앞두고 ‘우리도 달걀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트럼프가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미국 땅으로 만들겠다고 떠드는 마당에 덴마크 입장에선 설령 남는 계란이 있더라도 미국에 보내고 싶겠는가. 한국이 미국의 계란 민원을 들어줬으니 미국도 차후 예상되는 무역 및 안보 관련 협상 때 한국의 처지를 배려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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