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별빛 아래 달리다 맞이하는 남태평양의 장엄한 일출[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사이판 국제마라톤 대회 참가기
남태평양 북마리아나 제도에 있는 사이판은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이다. 올해 17회를 맞은 ‘사이판 마라톤’은 시내 중심에 있는 마이크로비치(Micro Beach)에서 출발한다. 푸른 야자수와 코발트블루빛 바다가 보이는 해변도로를 달리며 탁 트인 바다 풍경과 열대 섬의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코스로 유명하다.
이달 8일 열린 올해 대회에는 19개국에서 온 612명이 참가했다. 한국에서도 200명 넘는 러너들이 참가했다. 마라토너이자 자선가로 유명한 가수 션, 철인 3종 경기를 완주한 배우 유이도 10km 코스를 달렸다.
기자도 원래는 취재만 하려고 왔는데, 대회의 생생한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5km 코스에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런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뛰어 본다는 것. 얼마 만인가. 2001년 3월, 30대 초반에 내 인생 첫 마라톤을 뛰었다. 동아마라톤(현 서울국제마라톤) 하프코스(21km)였다. 당시 동아마라톤은 1970년 이후 30년 만에 서울 한복판을 달리는 코스로 변경해 서울국제마라톤으로 재탄생했다. 이후에도 모두 세 번 하프코스를 완주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이제 50대 중반. 체중은 20kg이나 불었다. 평소 등산이나 걷기는 꾸준히 했지만, 누가 봐도 장거리를 뛰기에는 무리인 몸이다. 그래도 24년 전 하프코스를 달린 기억을 되새긴다. 마라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속도’. 천천히, 무리하지 않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게 되면 뛸 수 있지 않을까.
드디어 3월 8일, 사이판 마라톤의 날이 밝았다. 한낮 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하기 때문에 마라톤은 새벽에 뛴다. 풀코스는 오전 4시, 하프코스는 오전 5시, 10km와 5km 코스는 오전 6시에 출발한다. 밤하늘 별빛 아래서 달리다가 해변에서 남태평양의 장대한 일출을 마주하게 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는 코스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출발했다. 지역 주민인 자원봉사자들이 나눠 주는 물을 마시며 한 2km쯤 달렸을까. 15분 먼저 출발한 10km 코스 참가자 가수 션이 맞은편에서 달려온다. 벌써 반환점을 돌고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다. 엘리트 선수급 몸매를 가진 션은 바람처럼 ’쌩’ 하고 스쳐 지나간다. 대회 후 션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니 “올해 1, 2월만 해도 모두 1000km를 뛰었다. 지난해에는 총 8000km를 뛰었다”고 한다. 그의 첫딸 하음양과 셋째 아들 하율 군도 이날 레이스를 함께했다.
반환점을 막 돌았는데 갑자기 대회 관계자들이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댄다. 멋진 포즈를 위해 엄지손가락을 올려 따봉을 날려 주었다. 그런데 카메라맨이 “헤이! 유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순간 뒤돌아보니 유이가 바로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나도 휴대전화를 열어 급하게 카메라를 켰다. 유이의 뛰는 모습을 담고 싶었지만, 긴다리로 껑충껑충 앞서간다. 그를 따라잡겠다고 무리했다가는, 걷거나 쉬지 않고 5km를 뛰겠다는 목표는 물건너갈 것이 뻔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앞질러 가더라도 오버페이스는 금물이다. 나만의 스피드를 지키며 고독하게 내 갈길을 가야 한다.
4km 구간이 지나자 슬슬 몸의 에너지가 올라온다. 남은 1km 구간에서 좀 더 힘을 내 속도를 높여 본다. 가라판 사거리에서 만나는 교통경찰들마다 엄지손가락을 올리며 “굿 잡(Good Job)!”하고 응원해 준다.
마이크로비치 결승점이 눈앞에 있다. 마치 우승자인 것처럼 테이프를 끊으며 결승점에 들어왔다. 기록증을 보니 49분16초. 1시간을 목표로 했는데 11분 정도 앞당겼다. 50대 중반에, 24년 만의 장거리 달리기에 성공한 것을 자축했다. 무엇보다 내 몸무게를 두 다리 근육과 무릎이 다치지 않고 잘 버텨 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부부 마라토너인 김자경 이윤정 씨는 아내 이 씨가 먼저 마라톤에 푹 빠져 남편도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10km 마라톤을 잘 뛰었으니 이제 사이판 곳곳을 함께 탐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풀코스를 뛴 30대 남성은 “사이판 마라톤 대회에서 좋은 공인기록을 얻어 4월에 열리는 보스턴국제마라톤에 신청할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 마라톤 후 사이판 여행
런트립 마라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건강을 위해 달리고 난 후 더욱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사이판은 어디든 차를 타고 20분이면 갈 수 있는 작은 섬이라 한나절이면 관광명소를 대부분 구경할 수 있다. 대신 산과 바다, 들판에서 몸으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액티비티가 많다.
사이판 섬 남단부 산안토니오 비치에 있는 ‘퍼시픽 아일랜드 클럽(PIC) 리조트’에서는 사이판 최대 규모 워터파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어린이를 위해 영어로 진행하는 키즈아카데미, 현지 학교와 연계한 한 달 살기 프로그램 ‘아카데믹 펀 스쿨링‘도 운영해 가족 단위 여행자가 많이 찾는다.
글·사진 사이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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