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녹이며 스스로 피는 꽃, 복수초를 보며 떠올린 한 여인 [작가와의 대화]
■ 봄과 어머니 ■
이름도 쓸줄 모르던 엄마는 딸들을 도시로 보냈다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그런 자식들은 엄마가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저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 하지만 장롱에는 색색이불, 엄마의 꽃밭이 있었다. 연둣빛 움이 돋는 계절. 꽃들 속으로 함께 걷고 싶다. 엄마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인다.
봄이 되면 어머니가 그립다. 이별한 지 40년이 넘었다. 봄은 어머니와 함께 오는 계절일까. 뜰에 꽃들의 움이 돋은 걸 보고 와아! 움이다!라고 외치다가 바로 어머니가 겹친 것이다. 어머니는 땅이 부드러워지라고 호미질을 해 주다가 혼자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야아 이거 봐라 다 살아돌아왔다캉께." 연둣빛 움이 간지럽게 솟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살아돌아온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뻐하셨던 것이다.
그때 나도 시큰둥했고, 지금 내 딸들도 시큰둥하다. 봄이니까 움이 돋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그 자연스럽고 당연했던 일들에도 감격과 감동이 온다. 그것도 아주 눈물겹게 말이다. 그렇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고 나면 아침이고, 저녁이 지나면 밤이 온다는 그 뻔한 철칙에도 잔잔한 감동이 있는 것이다.
나이란 서서히 당연한 것에 대한 감사와 간절함이 새겨지는 것이다.
어머니는 무식했다. 이름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래 동서는 대구 경북여고를 나온 재원이었다. 동서의 거울 옆에는 세라복을 입은 여고생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그 사진 보는 일을 괴로워했다. 그러나 딸들에게 작은집 심부름을 시킬 때 꼭 그 사진을 보고 오라 하셨다. 갈망을 가지라는 것. 어머니 성공은 곧 숙모님이다. 더도 덜도 아닌 숙모같이만 돼라 하셨다. 성공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숙모님이 가진 것을 하나도 갖지 못했다. 학력, 인물, 인품, 부모. 그리고 큰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딸이 여섯, 아들이 하나였지만 숙모님은 아들이 여섯, 딸이 하나였다. 치명적인 차이다.
거기다 숙부님은 국회의원까지 했으니 숙모님을 사모님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높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신의 딸 중에 동서보다 높은 딸을 만들기로 인생 개선안을 마련했다.
1955년 전쟁의 기미가 다 가기 전 셋째 딸을 산골 시골에서 마산여고로 보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당장 데려오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넷째 딸을 마산여고에 입학시켰다. 졸업하고 모두 결혼해 버렸다. 포기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사회적 욕구는 포기가 없었다. 다섯째 딸을 부산으로 보냈다. 마산은 터가 나쁘다는 것이다. 부산으로 가는 차부에서 어머니는 당부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여자로서 행복해라." 어머니가 가지지 못한 것이다.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대학 조교를 할 때 딸의 성공은 바로 옆에 있는 듯했다. 가능성의 시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희망은 거기까지다. 어머니의 전 인생이었던 다섯째는 결혼 후 나락으로 떨어졌고, 그때 그 충격으로 몇 달 만에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세상에서 젤 불쌍한 여자 나오라면 다섯째 딸이 걸어 오겠다"라는 충격의 말을 남겼다. 절망이 죽음을 불렀다. 불쌍한 여자가 되지 않고자 혀를 물고 고난을 견디었다. 박사를 하고, 교수를 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다섯째 딸은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그냥 밥하고 빨래하는 엄마, 딸들을 못살게 군다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의 옷장에는 비단으로 만든 이불이 색색으로 놓여 있었고, 곱게 수(繡)를 놓은 베개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결코 그 베개나 이불을 사용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덮었던 이불이나 베개는 걸레같이 낡고 구차했다. 장롱 안의 색색 이불, 그것은 어머니가 눈으로 즐기는 꽃밭이었던 것이다. 그 꽃밭은 어머니의 '여자'를 표현하는 유일한 꽃밭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새벽 3시 어머니가 마루에서 우두커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자주 집을 비운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의 새벽 3시의 모습은 바로 '여자'를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가 여자라는 것을 안 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세월이 흘러서였다. 내가 혼자 하늘을 바라볼 때쯤 어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여심만심(女心滿心)의 어머니가 저 봄꽃 속에 살아있으리. 그토록 좋아하시던 꽃들이 만개(滿開)했는데 어찌 살아 오시지 않겠는가. 이 현란한 봄 속에 어머니가 이젠 늙어 울음도 고요한 딸을 보고 웃으실라나. 저 꽃들 속으로 어머니와 함께 걸어 보고 싶다. 활짝 웃으시는 어머니 모습 보인다.
지금도 용서받고 싶은 것은 늘 아프다는 어머니를 향해 "언제 엄마 안 아픈 적 있어!"라고 냉담하게 쏘아붙였던 것이다. 지금 내 딸이 이렇게 말하면 난 울 것 같다. 노인은 약하고 속울음이 많으니까….
아침에 뒷산에 가서 놀랍게도 노랗게 핀 복수초를 만났다. 복수초는 참으로 훌륭한 꽃이다. 복수초는 피고 싶은 순간에 온몸에 열기를 가득 채워 자신을 두르고 있는 눈과 얼음을 녹여 스스로 피는 꽃이다. 얼음과 눈은 무엇인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다. 주어지지 않는 권한과 변화할 수 없는 나약함.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족쇄일 수도 있다. 복수초는 그 감금을 풀어헤치고 노랗게 활짝 얼음을 이겨내는 장군으로 피워내는 꽃이다. 그렇게 그렇게 복수초처럼 스스로 자기의 약점을 보완하고 스스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꽃처럼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사람은 내 어머니다.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세계에서 작고 큰 행사가 열렸지만 내 어머니를 회상하는 일보다 작아 보였다. 어머니는 세계 여성의 날 수장처럼 내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살아내자' '피어내자' 오직 결의 하나로 온몸에 열기를 뿜어 눈과 얼음을 녹여 생존 위기를 넘어서는 21세기의 화두(話頭) 복수초.
신달자 시인
Copyright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진호, 故김새론 절친 녹취록 공개 "사망 원인은 남편 폭행·협박"
- "행복하고 건강해지려면 성관계…심장 건강 개선하고 스트레스 낮춰"
- '女 폭행' 황철순, 출소 후 아내 사생활 폭로 "성형·男과 파티"
- "눈 떠보니 알몸"…대리기사, 손님 성폭행·불법 촬영
- "남편이 집에 안 온다" 실종신고 60대, 숨진채 발견된 의외의 장소
- '신사의 품격' 유명 여배우, 피부과 시술 중 2도 화상…"의사 5000만원 배상"
- 장영란 초기 치매 진단 받았다 "언어 기능 떨어져"
- 신지호 "탄핵시 尹 상왕정치 우려돼…심지어 金 여사 후보설까지"
- 정지선 셰프, 둘째 유산 고백 "9주차에 떠나보내"
- '1500원 커피숍'서 상견례한 예비부부 "손님들 좀 조용히 시켜주세요"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