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아파트 주민자치방에 초대됐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983년에 지어졌다. 사람 나이로 치면 이제 40대 초반이니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워낙 새 건물이 빠르게 올라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홍색 외관 때문일까? 실제보다 ‘노안’처럼 느껴지는 이 아파트에 어쩌다 보니 7년째 살고 있다. 초등학교만 네 군데를 다녔고, 상경한 이후에는 2년 끽해야 1년 더 연장된 계약 기간에 맞춰 이곳저곳 떠돌았던 나는 한 곳에 이렇게 오래 사는 게 처음이다. 정주한다는 것은 그 동네를 잘 알게 된다는 것. 그냥 있었을 뿐인데 첫 방문부터 맘에 들었던 동네 이자카야에서는 이제 제법 단골손님 취급을 받고, 옆집 어르신들과 9층 합기도 형제, 동대표님은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할 정도로 낯이 익었다. 집에서 2분 거리라 계속 다닌 PT 숍에서는 장기 회원이 됐고, 미용실 원장님은 어느덧 중학생이 돼 ‘아이돌 콘서트에 보내 달라고 한다’는 딸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하여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오래된 가곡의 노랫말처럼 이곳이 진짜 내 집처럼 느껴지냐고 묻는다면… 그건 조금 다른 문제지만 동네 구석구석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싫지는 않고, 정든 이곳을 떠나 다른 지역에 사는 게 조금씩 상상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최근 작은 고민이 생겼으니 지난해 초, 새로운 동대표가 선출되면서 탄생한 단톡방 ‘1동 주민자치방’의 존재다.
40년 넘은 9층짜리 아파트, 그나마 3층까지는 상가인 ‘주상복합’ 형태라 이 단톡방에 초대된 사람 수는 고작 26명이다. 처음에는 갑자기 생긴 단톡방에 거부감이 없었다. 반상회를 매번 빼먹는 게 맘에 걸렸는데 혹시 톡방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려나 싶어 안심되는 부분도 있었다. 새 동대표님은 아마도 이 아파트가 분양될 때 입주한 분인 듯했다. ‘귀한 자료’라면서 무려 1983년 당시의 분양 카탈로그를 촬영해 단톡방에 공유했다. 이 아파트가 ‘한국화약그룹’ 산하의 ‘태평양건설’이 지은 ‘새로운 스타일의 비즈니스 맨션’으로 광고했다는 것, 아래층인 상가인 이유는 ‘아빠의 사회생활과 가족의 생활이 밀착될 수 있도록’ 한 당시의 아이디어 때문이었다는 것, 국내 최초로 세대별 난방을 시도했다는 점 등의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오! 귀한 자료네요. 감사합니다” 대체 뭐가 감사했을까? 모든 단톡방에 꼬박꼬박 답변하는 기질을 가진 나는 이후에도 ‘주민 자치방’에 가장 열심히 답하는 1인이 됐다. 결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투표에 참여하고 하다못해 관리비 정산 내역에 하트라도 찍으면서…. 그러나 처음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건설적인 논의들이 이뤄질 것 같던 단톡방은 점점 성토의 장이 되어갔다.
(주차된 오토바이 사진) “며칠째 여기 있던데 지하 주차장으로 이동 바랍니다” / (복도 창틀 담배꽁초 사진) “이거 우리 주민이 한 것 맞습니까?” / (엘리베이터 앞 화분들 사진) “통행에 방해가 될뿐더러 소방법에 위반될 위험이 있으니 치워 주시길 부탁합니다” 동대표님의 이런 카톡을 볼 때면 나까지 덩달아 혼나는 기분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기에 받아 들였다. 오래된 아파트를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일까! 여름 폭우가 쏟아지면 외벽에 녹물이 흐르고, 겨울 한파가 오면 행여나 배관이 터질까 봐 모두 세탁기를 멈추는 팀플레이를 해야 한다. 그러나 동대표 아닌 다른 이들의 날 선 답변까지 확인해야 하는 일은 나를 울적하게 만들었다. (교체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수리에 들어가자) “왜 사전 공지를 안 하셨는지, 제대로 된 업체를 알아보고는 하신 건지 의문입니다”/ (가구 방역이 평일 오전에 진행된다는 공지에 올라오자) “그럼 출근하는 직장인은 어떡하죠?” 이 정도는 약과였다. “○○에서 감자튀김을 주문했는데 바퀴벌레가 나와 항의했더니 우리 아파트가 노후한 탓에 배달 완료 후 들어간 것이 아니냐며 제 탓을 하네요. 이건 주민 모두 화내야 할 일 아닌가요?”라는 406호의 카톡을 봤을 때는 내 눈을 의심했다. 함께 올라온 바퀴벌레가 생생하게 찍힌 사진까지.…. 이딴 건 너 혼자 보라고! 핸드폰을 던졌다가 다시 집어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혹시라도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게 되면 기다려주지 않고 재빠르게 닫힘 버튼을 누르리라.
지난해 개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갑작스러운 대지진으로 근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건물이 된 황궁아파트 입주민들의 이야기다. 고립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대다수의 디스토피아 영화가 그렇듯 제한된 물자와 긴박한 상황 속에 차츰 추악해지는 인간 군상을 그린다. 결국 주인공 명화(박보영)는 아파트를 벗어나고, 밖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이 “거기 사람들은 인간을 먹는다는데 진짜냐?”라고 묻자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고. 나를 포함해 이 건물에 살고 있는 평범하고 각자 나름대로 이상한 주민자치방 속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아파트 재개발을 고대하며 오래도록 살고 있는 토박이와 근처 상가에 가게가 있는 주민, 잠깐 살고 떠나는 젊은 커플이 대부분인 이 건물에서 어쩌면 고양이 두 마리와 7년째 상주하며 현관 앞에는 치우지 않은 맥주 캔과 신문을 산더미처럼 쌓아 둔 내가 가장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단톡방 속 사람들의 말에 조금 더 너그러워져 보려고 한다. 그러나 황궁 아파트 같은 고립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406호와는 라면 수프도 나누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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