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마무리 하는 법, 나는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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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갑 기자]
며칠 있으면 어머니가 곁을 떠난 지 20년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 곁에서 속삭이듯 가야 할 길을 일러 주신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네가 서울에 가고 싶다면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야 한다. 남들은 따뜻한 방에서 자고 아침 먹고 비행기 타고 가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돈이 없다. 그래서 완행열차를 타고 가야 하기에 그 전날 저녁에 출발하여야 한다. 당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완행열차는 12시간 이상 걸렸다.
공부를 하면서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인일능지 기백지 인십능지 기천지. 남이 한 번 하여 잘할 수 있으면 나는 백 번을 해야 하고, 남이 열 번 하여 잘할 수 있으면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
'人一己十(남이 하나 할 때 나는 열을 한다)'을 삶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다. 능력이 많이 모자라기에 남과 같아지려면, 남과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의 몸을 혹사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 다니면서 그리고 직장 생활하면서 몸이 아프거나, 어설픈 이유로 결석이나 결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몸이 따라갈 수 없을 때는 하루에 타이레놀을 몇 개씩 먹거나, 쓴 커피를 여러 잔을 마시며 버텼다. 어릴 때 어머니의 가르침이 몸속에서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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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때 어머니와 함께 |
ⓒ 정호갑 |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친구 결혼에 관해 이것저것 물으셨다. 묻다가 갑자기 어머니께서 걱정스레 말씀하신다. "니 누구와 싸웠나?", "아니"라고 답하며 되물었다. "왜 싸웠느냐"고 묻는데. 어머니께서는 "니 말이 자꾸 샌다. 싸우다가 입안이 다친 것은 아니냐?"라고 말씀하신다.
술에 취해 말이 샜는데, 그때까지 어머니는 내가 술을 먹는 줄 모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주정이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순간이라도 이성을 놓치는 것이 싫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들은 술을 먹지 않길 바라셨다.
어머니의 바람을 지켜주지는 못했지만, 그로 인해 어머니의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나름 애썼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도블록을 보며 걸음을 바로 하였고, 현관문을 열 때 "다녀왔습니다"를 흐트러지지 않게 발음하기 위해 걸어오면서 수없이 되뇄다.
어머니의 믿음을 생각하며, 지금까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
내가 해외로 파견 나간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께서 아프셨다. 아픈 어머니를 두고 해외로 나가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지만, 못난 자식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니 갔다 올 때까지 내 살아 있을게."
이 말씀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약속을 지키셨다. 내 파견 기간이 끝나는 바로 그날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어겼다. 해외 파견 기간을 연장했기 때문이다.
비록 어머니와의 약속은 못 지켰지만, 이후 약속의 무게를 거듭거듭 느끼며 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나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나이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지?
생에 갚아야 할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퇴임을 이태 앞두고 산골에 주택을 마련하였다. 주위에서 '왜 산골로 가느냐?'라는 물음에 여러 가지로 답을 할 때도 있었지만, 가장 명확한 답은 나의 한계를 깨달았으니 이제 마무리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산골로 들어오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다. 나를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깨우친 것은 지금까지 내 곁에서 나를 믿어주고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미안하고 고마움이다. 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다 갚지는 못하더라도 남아 있는 날 동안 갚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나는 이것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아버지가 외출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볼펜과 종이를 주고 외출하시라'라고 했단다. 어머니는 당시 거동이 불편하여 누워 생활하고 계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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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에게 남기신 말씀 |
ⓒ 정호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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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남기신 말씀 |
ⓒ 정호갑 |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72년의 삶을 풀어내었다. 어머니는 1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을 돌보아야만 했다. 23세 시집 와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그리고 시동생 두 명과 시누이 한 명과 함께하면서 힘들고 어려웠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시어머니의 병시중과 시누이와 시동생을 결혼시킨 과정에서 겪은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을, 시동생 결혼할 때 돈이 너무 없어 봉채도 보내지 못하였는데, 의논할 상대가 없는 답답한 심정을.
살고 있는 집이 침수 지역이라 비가 조금만 오면 물에 잠겼다. 어떻게 할 수 없어 빚을 내, 집을 짓기는 지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시에서 구역 정리로 시유지를 강제로 분양을 받아야만 했다. 빚에 빚이 더해졌다. 아버지는 집을 처분하고자 하고, 어머니는 그래도 이 집이나마 어떻게든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해 홀로 많이 울었음을.
그 후 빚도 갚고, 집도 새로 짓고, 아들이 결혼하고 손자도 태어나 행복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날 병이 찾아와 행복이 끝나고 말았다는 아픈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신이 복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인데 그로 인해 아들과 며느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이 많이 후회가 된다는 말씀도 남겼다. 두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아끼며 잘 살아주길, 그리고 생각하고 말하길 부탁하면서 앞으로 행복하길 바란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미안하고 고맙고 부탁한다
어머니가 남긴 말씀을 다시 읽는다.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미안하고,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어머니로부터 삶의 마무리를 배웠다. 어머니보다 인품이 많이 모자라는 나는 지금부터 그 준비를 해야 한다. 산골에서 나를 돌아보며, 나를 믿어주고 힘이 되어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라고 말하고, 나의 모자란 인성으로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삶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를 배웠다(관련 기사 : 내 나이 따라 아버지의 학력은 계속 바뀌었다). 부모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부모를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부모를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다. 어머니의 기일을 앞두고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이었음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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