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절실한 우크라, 느긋한 러… 협상력 불균형에 미봉책 우려 [세계는 지금]
트럼프 “조기 종식”… 특사도 지명
‘영토 수복’ 필수조건 건 젤렌스키
나토 가입 승인 전제로 입장 선회
거침없이 진격하는 러 ‘협상 우위’
교전선 동결·나토 가입 반대 입장
해당안 수용 땐 우크라 안보 불안
“러 유리한 협상 땐 美 등 안보 위협
北·中·이란 등 결속력 커질 것” 경고
푸틴 수용할 안 없어 공회전 전망도
문제는 종전 협상이 추진될 경우 이러한 입장 차이가 협상력의 불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구상하는 ‘종전 시나리오’의 골자 역시 전선 동결인 것으로 전해지면서 종전 협상이 우크라이나의 안보 위협을 해소하지 못하는 ‘미봉책’으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종전 협상 절실해진 젤렌스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트럼프 당선인의 재집권이 확정되자 연일 종전 협상을 향한 열의를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에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 수복을 종전의 필수조건으로 고수해왔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러한 입장까지 철회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영국 스카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보호가 보장된다면 전쟁의 ‘과열 국면’을 끝낼 수 있다”며 “현재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영토 반환은 추후 외교적으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토 가입이 승인된다면 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한 상황에서도 종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처음으로 밝힌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으로서는 종전 협상이 갈수록 절실해지는 상황이다. 전선의 열세를 좀처럼 극복하지 못하는 가운데 최대 지원국인 미국의 군사 원조마저 끊길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은 올해 8월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를 기습 점령하는 성과를 냈지만, 결과적으로 이를 이용해 격전지인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의 우세를 뒤집는 데는 실패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일 일본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우크라이나가 ‘군사적 수단’으로 러시아에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이례적으로 인정하며 “외교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종전 협상에 느긋함과 시큰둥함으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현재 전황뿐 아니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구상 중이라고 거론되는 ‘종전 시나리오’ 역시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최근 거침없이 진격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지난 11월 한 달간 러시아가 새로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는 725㎢가 넘는다. 이는 싱가포르 전체 면적(719㎢)보다 넓은 규모로,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인 2022년 3월을 제외하고 가장 큰 영토 확장이라고 AFP는 분석했다. 러시아가 지난달 말 기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총면적은 6만8050㎢에 이르는데,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름반도까지 합하면 현재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국토 면적의 약 27%가 러시아 점령지가 된 상태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구상 중인 종전 계획에는 이러한 러시아의 점령지를 그대로 인정하는 전선 동결 방안이 담길 것으로 관측된다. J D 밴스 부통령 당선인은 지난 9월 우크라이나 종전안의 구체적 내용으로 현재 교전선을 동결해 약 1290㎞의 길이에 달하는 비무장지대를 조성하자는 방안을 공개한 바 있다. 또 밴스 당선인은 당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최소 20년간 유예하자는 방안도 함께 제안했는데, 나토 가입을 보류하자는 구상은 트럼프 당선인이 우크라이나·러시아 특사로 지명한 키스 켈로그 역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현재의 교전선을 동결하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저지하는 것은 모두 러시아의 요구사항이다. 이러한 요구가 수용된다면 우크라이나로서는 빼앗긴 영토도 포기하고, 안보 불안도 그대로 떠안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러시아에 과도하게 치우친 협상안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이 러시아의 재침공을 막을 근본적 해법이라고 보고 있다.
러시아에 유리한 방향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된다면 유럽과 미국의 안보 위협도 증가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에 불리하게 타결된 협상이 “북한과 러시아, 이란, 중국 등 미국 적대국들의 결속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이같이 경고했다.
뤼터 사무총장은 또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 추후 다른 분쟁의 해결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점령지 상당 부분을 점유하도록 허용하면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대만에 무력을 사용할 때 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시 주석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상황을 세심하게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뤼터 총장은 지난달 22일 트럼프 당선인과의 면담에서도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의 중요성을 설득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협상 테이블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도록 군사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군사 지원을 호소하러 미국을 수차례 찾은 젤렌스키 대통령을 “지상 최고의 세일즈맨”이라고 조롱하며 자신이 취임하면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해왔다.
일각에서는 ‘거래의 달인’을 자처하는 트럼프 당선인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종전 협상이 ‘시기상조’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고 분석한다. 러시아가 계속해서 ‘잃을 게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미국산 장거리미사일 사용 허가 취소, 젤렌스키 대통령 사임 등 추가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한다면 트럼프 당선인도 협상 성사가 오히려 손해라는 판단을 내리고 이를 추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의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연구원도 “트럼프 당선인을 포함한 서방 지도자 중 푸틴 대통령이 받아들일 만한 종전안을 제시할 사람은 없다”며 종전 협상이 공회전에 그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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