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의 모든 것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9. 18.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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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 경제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경제학자도 없을 것이다. 영국 행정부 공무원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대학 교수가 된 뒤에도 재무부의 경제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이듬해인 1919년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패전국 독일에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물려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했다. 1871년 독일과의 전쟁에 패한 프랑스가 대표적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 대표단 일원으로 평화 회의에 참석한 케인스는 반대 의견을 냈다. 그는 “독일의 과도한 배상금 지불은 되레 세계 경제 발전의 화근이 될 것”이라며 “전쟁 기간 전비 조달을 위해 국가들 간에 서로 빌린 채무를 모두 상쇄하자”고 주장했다. 승전의 기쁨에 취하고 독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프랑스 등이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그는 실의에 빠져 영국 대표단을 떠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왼쪽)와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46년 사망한 케인스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지 못했다. 경제학 부문의 노벨상은 1969년에야 제정됐기 때문이다. 1930년대 케인스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하이에크는 75세이던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다시 학자로 돌아온 케인스는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1919)을 펴냈다. 전후 세계 경제 재건을 위한 그의 구상은 비록 현실에 반영되지 못했으나 학문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책으로 케인스는 1922년, 1923년, 1924년 3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왜 경제학상이 아니고 평화상이었을까. 노벨경제학상은 케인스 사후 23년이나 지난 1969년에야 제정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의 명성이 워낙 높다 보니 그 경제학상의 권위 또한 남다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1899∼1992)는 노벨경제학상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1960년대 미국과 유럽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운 이들이 보기에 하이에크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한물간 학자였다. 그랬던 그가 케인스 생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며 일약 학계의 재조명을 받고 세계적 석학으로 우뚝 선 것이다.

하이에크는 케인스보다 훨씬 어리지만 활동 시기는 겹친다. 케인스는 경제에서 공공 부문 지출 등 정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하이에크는 모든 형태의 계획 경제에 반대하고 정부의 경제 개입 최소화를 역설했다. 두 사람은 1930년대 영국 학계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였는데 당시 승자는 분명히 케인스였다. 그에 힘입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스의 경제 이론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런데 1974년 스웨덴 한림원은 뜻밖에도 하이에크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당시 하이에크의 나이가 75세였으니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이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그의 이론에 입각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면서 하이에크의 영향력은 하늘을 찔렀다. 케인스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나와의 논쟁에서 진 패자”라고 뒤끝을 부렸을지 모를 일이다.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의 신간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SNS 캡처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78)이 펴낸 책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한국경제신문)이 최근 한국어로 옮겨져 국내에 출간됐다. 저자는 총 11개의 챕터 가운데 하나를 온전히 노벨경제학상에 할애했다.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올해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는 솔직한 고백이 독자들을 미소짓게 만든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다. 경제학은 특히 강세여서 역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의 70% 이상이 미국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저자는 미국을 “어두운 사회”라고 부르며 미국 경제에 드리워진 그늘을 지적한다. 저자 본인을 포함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른바 ‘석학’의 조언대로 경제 정책을 집행한다고 해서 경제가 꼭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일까. 마침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 ‘경제학자가 경제를 망쳤나’에 눈길이 확 쏠린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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