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톱10' 대만 5곳, 한국 0…패키징 혁명, K반도체의 위기 왜 [반도체 패키징 혁명]

심서현, 박해리 2024. 9.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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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2월 17일 충남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 지난 3월 중국 상하이 반도체 전시회에 간 국내 패키징 장비 업체 대표는 깜짝 놀랐다. 멀리서 ‘한국 OO사 장비구나’ 생각했는데, 가까이서 보니 중국 브랜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대표들이 모이면 “10년 안에 우리 다 망하겠다”는 탄식이 나왔다.

#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6월 대만 전자박람회 컴퓨텍스에서 “TSMC를 둘러싼 생태계는 풍부하고 패키징 기술은 놀랍다”며 계속 대만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메모리 공급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반도체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패키징 혁명’이 시작됐다. 칩을 3나노(㎚·1㎚=10억 분의 1m) 이하로 작게 만드는 미세화 기술이 한계에 이르면서, 로직·메모리·센서 등 다양한 칩 여러 개를 쌓고 묶어 성능을 높이는 패키징 기술이 인공지능(AI) 반도체와 고성능 컴퓨팅(HPC)의 열쇠가 됐다. 그간 경시됐던 반도체 후(後)공정인 패키징이 혁신의 최전선이 된 것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최근 보고서에서 “첨단 패키징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위주로, 기존 반도체 산업 구도가 급격히 바뀔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패키징 소부장 국산화에 국가 역량을 쏟아붓고, 첨단 패키징에 뛰어난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 대만 TSMC 앞에 엔비디아·애플 같은 빅테크가 긴 줄을 선 이유다.

지난 3월 엔비디아 기술 콘퍼런스 GTC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차세대 AI 가속기인 그래픽처리장치(GPU) B200을 소개하고 있다. B200에는 SK하이닉스가 생산한 HBM3E 8개가 탑재되는데, TSMC의 첨단 패키징 기술인 CoWos를 적용해 결합한다. AFP=연합뉴스
TSMC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용 첨단 패키징 기술 InFo를 사용해 제조한 애플의 AP A17프로. 현재 아이폰15프로에 탑재됐다. 사진 애플


한국은 이 혁명의 주체가 아닌 제물이 될 판이다. 첨단 기술에서 밀린 한국의 세계 패키징 시장 점유율은 6%(2021년)에서 4.3%(2023년)로 낮아졌고, 올 상반기 반도체 증시 랠리가 이어지는 중에도 국내 후공정 대표주자 네패스·하나마이크론 주가는 도리어 하락했다. 한 국내 소부장 임원은 “한국 HBM이 잘 나간다지만 이를 AI 반도체에 부착하는 첨단 패키징은 모두 대만에서 이뤄지며, 국내 장비 업체 10곳 중 8곳은 매출이 줄었다”라고 말했다.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첨단 패키징 핵심 소재·장비의 95% 이상을 해외에 의존한다.

차준홍 기자


‘초융합’ 없어 ‘초격차’도 없다


첨단 패키징은 소재의 화학·전기적 특성과 장비·공정이 어우러져야 해, 반도체 기업과 소부장의 긴밀한 협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강사윤 한국마이크로및패키징학회장은 “국내 패키징 업체는 연구개발(R&D)에서 R(연구) 없이 D(개발, 생산)만 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국내 패키징 업체는 다수가 소수 원청(삼성전자·SK하이닉스) 물량을 나눠받는 구조라 메모리 업황에 따라 휘청이고, 첨단 기술에 투자할 여력도 부족하다는 것. 김남석 LB세미콘 대표는 “첨단 패키징은 고객사가 원할 때 개발하기 시작하면 늦기에 먼저 투자 해야 하는데, 중견기업이 홀로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벅차다”라고 말했다.

패키징 업계에서 20년간 종사한 최봉석 작가(『반도체 산업의 숨은 거인들』 저자)는 “대만은 세계 1위 패키징 업체 ASE는 물론 작은 회사도 고객사가 수십 곳에 달하는데, 국내 패키징 업체는 고객사 1곳에 매출의 70~90%까지 의존한다”라며 “한국은 여러 기업이 해외 고객사를 공동 유치하는 식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능동적 R&D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메모리 위주, 수직계열화로 성장한 한국 반도체 업계가 수평 협업에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국내 소재 업체 임원은 “애플용 칩 패키징 회의에는 대만 패키징 업체인 ASE와 기판 업체 유니마이크론, 소재 업체와 애플 본사 담당자까지 다 모이는데 한국에선 하청에 지시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소통·협력의 ‘초융합’에 실패해 기술 ‘초격차’를 상실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첨단은 美, 저가는 동남아로… 뻥 뚫린 韓 패키징


박경민 기자
첨단 패키징의 핵심 고객은 엔비디아·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빅테크다. 이 시장을 무기로 미국 정부는 첨단 패키징 기술을 자국으로 빨아 들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인디애나에 HBM용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하고 퍼듀대학과 R&D 협력에 38억 7000만 달러(약 5조 2000억 원)를 투자한다고 지난 4월 밝혔다. 삼성전자도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첨단 패키징 라인을 검토 중이다.

범용 반도체용 전통 패키징은 동남아가 강세다. 미중 갈등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면서, 말레이시아·베트남 등으로 투자가 몰린다. 지난 5월 말레이시아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는 53억 달러(약 7조410억원) 반도체 투자 계획을 밝히며 “설계·패키징·테스트 등 6만 명의 반도체 엔지니어를 양성하겠다”라고 말했다. 현재 세계 반도체 패키징 시장의 13%인 자국 몫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이미 인텔이 70억 달러(9조5600억원)를 투자해 말레이시아 페낭에 패키징 시설을 운영 중이다.

차준홍 기자

첨단 기술로 가는 길은 멀고 전통 일감은 빠져나가니, 국내 패키징 업체들이 모인 충청도는 지역 경제와 일자리가 흔들릴 위기다. 국내 한 패키징 업체 대표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과 정확히 반대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재편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병훈 포스텍 교수는 “인건비 등 비용에서 국내 전통 패키징 경쟁력이 사라지고 있어서, 첨단 패키징을 키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내에 패키징을 강화하려면 장소·인력 문제도 풀어야 한다. 지난달 대만 TSMC는 대만 타이난의 공장을 인수해 첨단 패키징 기지로 삼겠다고 밝혔는데, 이곳은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남부과학단지와 인접해 있다. 그러나 한국은 경기도 화성·용인·평택 등 기존 팹이 위치한 수도권에는 각종 규제로 클린룸을 늘리기 쉽지 않다. 지방으로 내려가자니 인력 수급이 난항이다. 삼성전자가 첨단 패키징 연구진을 천안으로 내려보내자 상당수가 경쟁사의 수도권 근무지로 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의 한 패키징 업체 관계자는 “신입사원 교육에서 허허벌판에 놓인 공장을 보고 실망해 바로 퇴사하는 직원도 많다”라며 “청년층이 지방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노력을 넘어 정부 차원의 인프라 지원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LB세미콘의 팹 내부. 박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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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서현·박해리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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