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다 살아난 ‘덕수궁 200살 나무’…사라진 궁궐의 기억 전한다
‘회화나무, 덕수궁…’ 특별전
일제도 없애지 못한 생명력
조선시대에는 왕이 머무는 궁궐마다 선대 왕과 왕후의 어진을 모시는 선원전(璿源殿)이라는 사당을 두고 간소한 제사를 지냈다. 거처인 법궁을 옮길 때는 선원전 어진들도 따라 옮겨갔다. ‘아름다운 근본’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선원전은 왕실의 근간과도 같이 여겨진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대한제국 시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세 곳에 설치되었던 선원전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헐려 없어지거나 훼손되었다.
올봄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된 덕수궁 선원전 영역을 둘러보면, 지금은 없는 것이 있었던 시절, 그리고 없어지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궁을 옮긴 이후로, 선원전과 주변 전각들은 영성문 너머 또 하나의 대궐로 불릴 만큼 덕수궁에서도 신성하고 특별한 곳으로 통했다. 그러나 고종의 죽음 직후 건물은 차례로 철거되어 창덕궁 공사의 자재로 쓰였고, 이듬해에는 그 터마저 민간에 팔려나가 사찰과 일본인 학교들이 들어섰다.
그러고 나면 자연히 그 과정을 목격했을 그때 사람들의 마음도 그려진다.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고 왕을 잃고 궁을 잃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10년, 연이은 절망 사이 3·1운동의 희망을 경험한 지는 1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이다. 보고도 차마 못 믿을 무참한 변화들에 헛웃음이 나왔을까. 어쩌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탄식했을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기억, 돌아올 역사
그때 사람들은 떠나고 없지만, 모든 것을 지켜본 이 하나가 그 자리에 아직 있다. 장례 때 관을 모시던 흥덕전 터에 우뚝 서 있는 200년 된 회화나무이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는 8월 한달 동안 선원전 영역 안의 옛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내부를 특별개방하고, 이 회화나무를 주제로 한 특별전 ‘회화나무, 덕수궁…’(8월31일까지)을 선보이고 있다. 이명호 작가가 찍은 회화나무 사진과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 20세기 초의 사진 자료 등을 소개하는 전시이다.
이 전시가 작지만 특별한 이유는 전시가 열리는 장소가 앞으로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옛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은 1930년대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임원의 사택으로, 광복 뒤에는 2011년까지 주한미국대사관의 관저로 쓰였다. 건물의 보존 여부를 두고는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2030년에 복원공사가 시작되면 철거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때까지 덕수궁 역사와 복원 사업을 알리는 전시관으로 활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전시의 중심인 회화나무 사진들은 나무가 간직하고 있을 사라진 궁궐의 기억을 지금 현존하는 장소 안으로 불러들인다. 미래에는 상황이 뒤바뀌어 이 장소가 없어지고, 옛날에 나무가 자리했던 풍경이 돌아오게 될 아이러니가 지금 이 전시를 보아두어야 할 시의성을 더한다.
다양한 각도와 빛깔로 거목의 인상을 담아낸 사진 작품들은 따로 제목이나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집 안을 천천히 돌아보며 나무와 터, 건물이 각각 또 함께 보낸 세월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작품 속 작가의 뜻을 헤아리기는 충분하다. 휘고 옹이 져도 당당하게 뻗어난 나무에 돋아난 잎이 섬세하게 표현된 사진들은 인간과 시간과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는 자연 문화유산에 대한 존경 어린 시선을 잘 보여준다.
사실 이 회화나무는 죽었다 살아난 적이 있다. 2004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를 입고 나서 몇해 뒤에는 잎을 내지 못할 정도로 나무가 말라버렸다. 나무를 관리하는 지방자치단체 공원녹지과가 고사 판정을 내렸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지만 2010년대 들어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푸른 모습을 되찾았다. 사망 선고도, 극적인 반전도 나무의 속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끼리의 이야기이다.
전시의 대표작인 흰 가림막 앞 회화나무 사진은 들판이나 사막에 빈 캔버스를 세워 비현실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이명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 아래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겨울이 오면 잎을 떨어뜨리지만 새봄을 지나 여름이면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내주는 큰 나무의 회복력은, 훼손된 궁궐터의 원래 모습을 찾는 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역사는 돌이킬 수 없어도 역사성은 되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없어졌으면 그만이지 뭐 하러 다시 만드는가, 큰 예산과 노력이 드는 문화유산 복원을 흘겨보는 이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실물이 없어진다고 해서 실체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 문화이자 역사라는 역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말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없애려 했지만, 없어졌다고 여기기도 했지만 사실은 없어지지 않았고 없앨 수도 없었던 것. 문화유산을 지키고 복원하는 일은 바로 그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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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식힐 옛 그늘의 향기
사택 마당가로 나가 회화나무가 선 발굴 터를 내려다보는 시야에는 서울 하늘과 광화문 빌딩들이 먼저 들어온다. 도시의 중심 지역에 남은 궁궐터는 덕수궁이었고 다시 덕수궁이 될 자리이다. 특별히 내구성이 강한 강판으로 만들었다는 가림막 안에서, 머지않아 100년 전 헐려 나간 궁궐을 10년에 걸쳐 복원하는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그 가운데에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는 세 시기를 그 자리에서 살아온 회화나무가 있다. 비스듬한 줄기를 지지대로 받친 모습은 오래전 목도한 사건을 증언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제 몫의 그늘을 만들고 있는 회화나무는 이 도시에서 자연유산(自然遺産)이 지니는 의미를 잘 보여준다. 사람이 지은 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땅이 빈터가 되는 것이 아님을, 건물이 없어진 자리에서도 여전히 시간이 흘러가고 역사가 이어지고 있음을 돌아보게 한다.
밀도 높은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달이 가기 전에 이 담장 밖의 궁궐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 돌아올 것들의 제자리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 아주 오래된 그늘 하나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까지가 8월에 덕수궁을 가장 깊숙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일지 모른다.
신지은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유산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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