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아름다운 것을 그렸더니 그게 조국이었다”
최남선이 1925년 시대일보에 연재했던 ‘심춘순례(尋春巡禮)’는 봄을 맞아 전국 명승지를 답사한 기록이었다. 이 여행기에서 최남선은 유독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에 이르러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말로만 듣던 ‘화순 적벽’을 처음 실제로 보았기 때문.
화순 적벽은 중국 황주의 적벽만큼이나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최남선은 이런 절경에다 어떻게 고작 중국 적벽의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냐며 분개했다. “괴석 맷돌 한 덩어리 밑으로 뜨물 찌꺼기 같은 물이 흘러가는 저 황주의 적벽”에 비하면, 화순 적벽이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또한 절벽이 붉기만 한 게 아니라 다채로운 색을 머금고 있으니, ‘적벽(赤壁)’이 아닌 ‘채벽(彩壁)’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썼다. 중국 적벽이 ‘깨진 기와 조각’이라면, 우리 채벽은 ‘야광주(어두운 데서 빛나는 구슬)’라고도 했다.
식민지 시대 조국의 자부심을 일깨우느라 최남선이 너무 과장한 게 아닌가 싶다가도, 막상 중국 우한 인근 양쯔강의 적벽과 우리나라 화순 적벽을 비교해 보면, 그의 주장이 이해되기도 한다. 지금처럼 동복댐이 생겨 절벽의 반이 물에 잠기기 전에는,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기암괴석의 위엄과 아름다움이 더욱 대단했을 터. 조선의 수많은 시인 묵객이 이곳을 무대로 시를 읊은 것도 당연했다. 대표적으로는 김삿갓. 그는 평생 전국을 떠돌았으나, 말년에 화순 적벽의 매력에 빠져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 ‘김삿갓 종명지’가 있다.
화순 적벽에서 낚시하던 오지호
원래 적벽은 동복천 상류 약 7㎞ 구간에 형성된 기암절벽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최남선이나 오지호가 바라보았던 같은 시점으로 적벽을 감상할 수는 없다. 1985년 동복댐이 조성되면서 15개 마을이 수몰되고 적벽 아랫부분이 물에 잠겼기 때문. 일부 구간은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통제되어 30년간 접근이 금지되었다. 2014년 개방되었으나,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갈 수 없고, ‘화순 적벽 버스 투어’를 예약하여 제한된 인원만 입장 가능하다. 물론 적벽 가까이는 물에 잠겨 가지 못하고, 전망대에서 멀리 적벽을 바라보는 데 만족해야 한다. 그래도 단언할 수 있다. ‘화순 적벽 버스’를 평생 한 번은 타봐야 한다고. 김삿갓의 도취, 최남선의 자부심, 오지호의 고향 사랑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지호의 생가는 동복면 독상리 277번지에 있다. ‘김삿갓 종명지’가 있는 구암리의 바로 옆 마을이다. 그의 집은 동복 오씨 13대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원래 화순군 동복면은 동복 오씨 세거지로 유명했다. 고려 시대 시중 벼슬을 지냈던 오대승이 석등 48기를 조성하고 매일 밤에 불을 밝히며 하늘에 경배해서 그 자손이 줄줄이 재상 반열에 올랐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여지승람』에 전한다. 실제로 하나의 자연석 암반에 48개의 구멍을 뚫고 심지를 꽂아 불을 밝힌 ‘독상리 석등’(1267년)이 문화재로 전해 내려온다. 어쨌든 동복의 기와집은 모두 동복 오씨 집안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오지호 생가는 현재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어 화순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500년 된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남아있다. 오지호가 일본 유학 중이던 1920년대 방학 때 고향에 와서 가족을 위해 직접 지었다는 한옥도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고 있다. 동복 오씨의 선대 어른이 하사받았다는 ‘효자문’도 그대로 서서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
고향의 초기 작품 대부분 소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미술은 명랑하고 투명하고 오색이 찬영(燦玲)한 조선 자연의 색채를 회화의 기초로 한다. 일본인으로부터 배운 일본적 암흑의 색채를 팔레트로부터 몰아낸다.” 실컷 일본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온 데다, 아직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는 형편이면서 “일본적 암흑의 색채”를 몰아내고 조선의 오색 찬란한 자연을 그려야 한다니! 조선의 자연이 너무나도 환하고 아름다워서, 그 색채를 회화로 옮기기만 하면 ‘민족미술’이 나온다고 그는 주장했다. “아름다운 것을 그렸더니, 그게 조국이었다.” 오지호의 말이다.
그러나 오지호가 고향에 머물던 시기 그린 초기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도판으로만 전하는 ‘동복 산천’이라는 작품이 있고, 유학 중 방학 때 고향에 와서 동복의 어린아이를 그린 ‘시골 소녀’(1929)가 용케 남아있다. 오지호의 초기작 대부분은 전쟁 중 동복 고향 집에 보관 중이었다가 불쏘시개로 사라져 버렸다. 300점이나 되는 작품이 그렇게 소실됐다.
광주 초가집 아직도 며느리 살아
1953년 그가 처음 지산동에 갔을 때는 이 일대가 온통 복숭아 과수원이고 딸기밭이었다고 한다. 집 앞으로는 개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초가집 서너 채가 있던 고즈넉한 시골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고향 동복과도 같은 아늑함을 느꼈다. 지산동의 풍성한 자연을 보면서, 오지호는 다시 기력을 회복했다고 썼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이야말로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며, 그래서 화가는 그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 식구가 늘자 원래 두 칸이던 지산동 초가집을 덧대어 네 칸으로 ‘확장’했다. 그래도 초가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새마을운동으로 ‘지붕 개량 사업’이 한창일 때도 오지호는 끝까지 초가집을 고집했다. 친환경적인 초가집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2년 작고할 때까지 29년간 이 초가집에서 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지금도 여전히 이 초가집은 보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오지호의 며느리가 계속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해마다 가을에 지붕을 다시 이어야 하지만, 겨울에 솜이불을 덮은 것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집이 초가집이라고. 초가 맞은 편에는 1955년 오지호가 직접 지은 7평짜리 아담한 화실이 ‘그림처럼’ 남아있다. 오지호가 평생 그린 작품 대부분은 이 화실에서 탄생했다.
지금 지산동에 가면, 옛 자연의 정취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오지호의 집 공간으로만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온 듯 평온하다. 현재 유족이 살고 있어 외부에 개방이 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곳이 오지호와 그 가족을 기념하는 장소가 되지 않겠나. 작은 마당의 다종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온통 오지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들이라 반갑다.
김인혜 미술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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