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길 위에서] 파타고니아의 매력에 푹 빠진 이유

경기일보 2024. 3. 1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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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날씨·정치적 상황에 우여곡절 많아
비자발급조차 어렵지만 머나먼곳서 고독 즐겨
모든 계획 무효화하는 장엄한 자연 앞에 겸손
토레스델파이네 등 함께 여행하며 든든함 느껴
엘찰텐 트레킹. 김남희 여행작가

 

누구에게나 마음에 품은 공간 하나는 있을 것이다. 그 땅에 닿기도 전에 영혼을 사로잡히고, 그 땅에서 돌아온 후에는 지우지 못하는 생채기처럼 그리움이 남는 곳. 내게는 지구 반대편의 멀고도 먼 땅 파타고니아가 그런 곳이다. 구글 검색을 하면 아웃도어 브랜드 이름이 먼저 뜨는 곳이지만 사실 그 브랜드의 창업자도 젊은 시절 파타고니아의 거벽을 오르내리며 그 땅과 사랑에 빠졌다. 한반도의 5배 크기인 파타고니아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에 걸쳐 있다. 안데스 산맥, 고원과 평원, 무수한 빙하와 피오르 해안을 품었고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대서양을 마주한다. 그 옛날 마젤란 원정대가 이곳을 찾아왔을 때 평균 신장이 180㎝에 이르는 원주민 테우엘체족을 보고 거인(patagon)의 땅이라고 부른 데서 이름이 시작됐다. 사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에는 명확한 지리적 경계가 없다. 아메리카 대륙 남위 40도 부근을 흐르는 콜로라도강과 네그로강 이남 지역을 말할 뿐. 그 이름이 내 인생에 처음 등장한 건 30대 중반일 때였다. 칠레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 ‘파타고니아 특급열차’와 ‘지구 끝의 사람들’ 덕분이었다.

이 분야 고전으로 꼽히는 브루스 채트윈의 ‘파타고니아’는 내게 별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칠레의 작가가 쓴 책에는 그 땅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살아있어 나를 흔들었다. 언젠가 그 땅에 가리라. 가서 그 땅의 바람과 햇살을 내 몸에 새기리라. 그런 다짐을 품고 있다가 40대 초반이 돼서야 파타고니아에 다다랐다. 도착하는 것만으로 이미 다 이룬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머나먼 땅이었다. 텐트와 식량을 이고 지고 다니며 혼자 캠핑을 했던 그 석 달은 내가 가장 멀리까지 나아갔던 시간이었다. 거대한 자연 앞에 단독자로 단단하게 선 듯한 기분이 들던 날들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모든 것을 날릴 듯 불어오는 바람 -실제로 토레스델파이네 국립공원에서 서양 남성이 날아가 다리가 부러지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하루에 사계절을 다 맛볼 수 있는 변덕스러운 날씨-파타고니아의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 금세 다른 날씨를 보여줄 테니-.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환경이 주는 막막한 고립감. 내가 살던 세계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 혼자 서 있다는 자유로움과 달콤한 고독. 그 땅의 모든 것이 기쁘게 내 영혼에 스며들었다.

비글 해협. 김남희 여행작가

올해 1월, 함께 여행하는 그룹인 방과후 산책단과 함께 세 번째로 찾은 파타고니아는 여전히 나를 뒤흔들었다. 그 땅의 날씨처럼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이 나를 후려쳤다. 원래도 치안이 불안정한 대륙으로 손꼽히는 곳이 남미다. 수많은 사건 사고를 감당해야 하는 곳이다. 작년에는 페루의 시위로 국경과 공항이 막히는 바람에 일정과 루트를 현지에서 급히 변경해야 했다. 올해는 볼리비아가 시작이었다. 관광비자를 받는 일이 그토록 힘겨울 줄이야. 하루이틀 비자를 발급하다가 인지 소진으로 업무 중단. 인지가 올 때까지 보름 남짓 대기. 발급 업무가 재개되면 이틀 만에 또 소진. 다시 대기. 결국 출국 일주일 전에 오전 5시부터 줄을 선 후에야 겨우 비자를 발급받았다. 달러가 부족한 나라라 비자로 달러 장사를 한다는 말이 돌았다(서울에서 받는 비자는 30달러, 현지 도착 비자는 120달러였다). 무사히 남미에 들어섰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아르헨티나 사태가 터졌다. 지난해 11월 당선된 새 대통령이 페소화 가치를 54% 평가절하하면서 호텔비, 투어비, 식사비 모든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미리 해놓은 예약도 아무 소용이 없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가치가 떨어진 돈다발 무게에 휘청이면서 예정에도 없던 긴축 재정을 펴며 다녀야 했다.

트레킹 하는 사람들. 김남희 여행작가

치안은 불안정하고, 시차는 정반대고, 멀기는 너무나 먼 남미 대륙. 그런데도 나는 왜 계속 남미로 향하게 되는 걸까. 모든 계획을 무효로 만드는 예측 불가능성이 어쩌면 이곳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더해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간이 함부로 손대지 못한 장엄한 자연. 통제불능의 냉혹한 자연이 남아있는 이곳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파타고니아의 주인이라고도 할 만한 거센 바람이 불어올 때면 더욱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된다. 파타고니아는 나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땅이다. 우리의 파타고니아 트레킹은 세 곳에서 보름 동안 진행됐다. 칠레의 토레스델파이네, 아르헨티나의 엘찰텐과 우수아이아. 토레스델파이네의 W 트레킹은 4박5일간 배낭을 메고 산장이나 텐트에 머물면서 걷는다. 그레이 빙하의 푸른 빛도, 프란세스 계곡에서 바라보는 바위 봉우리의 장엄함도 여전했다. 마지막 날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오전 3시 산장을 출발해 라스토레스 전망대로 향했다. 서로의 발자국 소리만이 사위를 채우는 길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걸었다. 추위와 바람에 덜덜 떨며 해가 뜨기를 기다리던 어느 순간, 모두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태양빛을 받은 거대한 바위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삼 이 행성에 인간으로 태어난 행운에 감사했다.

김남희 여행작가

토레스델파이네가 장엄하다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대표선수 격인 엘찰텐은 화려하다. 여기선 숙소에 짐을 두고 매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어 부담도 적다. 이곳 트레킹의 백미는 라구나데로스트레스 트레킹. 왕복 8시간이 걸리는 이 길의 끝에는 세 개의 호수 너머 3천m급 바위 봉우리 엘찰텐이 고생을 보상하듯 기다리고 있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또 다른 대표선수는 페리토모레노 빙하. 남극과 북극을 제외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빙하 중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빙하다. 아이젠을 차고 빙하 위를 걸으며 얼음의 성벽을 몸으로 껴안아 본 후에는 지구 최남단 도시 우수아이아로 향했다. 남극까지 1천㎞면 다다르는 곳이라 지구 끝까지 내려왔다는 어떤 우수 어린 감상에 젖게 되는 곳이다. 우수아이아 국립공원과 에스메랄다 호수를 걷고 난 후에는 배에 올랐다. 비글해협 투어를 하며 펭귄 무리와 보리고래들, 바다사자 떼와 가마우지를 만났다. 이 모든 트레킹을 하는 내내 자신의 페이스를 포기하고 후미를 챙겨준 분이 있었다. 꽃보다 사람이라고 했나. 혼자 하는 트레킹이 어딘가 비장하고 외로운 대신 세심히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면 여럿이 함께 걷는 길은 유쾌하고 든든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지구의 환경은 날로 망가져 가는데 여행을 하며 밥을 버는 일의 모순도 점점 나를 짓누른다. 토레스델파이네의 계곡이, 비글해협의 펭귄과 고래들이, 페리토모레노 빙하가 조금이라도 오래 남아 있으려면 내 발걸음이 멎어야 하니. ‘제로 웨이스트’ 여행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다음 여행지의 항공권을 검색하고 있는 나란 존재는 얼마나 이기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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