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48> ‘신비의 섬’ 야쿠시마 탐방기] 시간이 멈춘 숲과 물의 지상 낙원
일본에서 ‘신비의 섬’으로 불리는 야쿠시마(屋久島)로 가는 길은 멀었다. 인천공항에서 가고시마공항까지 비행기를 탄 뒤 가고시마항구에서 페리로 갈아탔다. 미니버스를 탄 채 배에 올라 4시간 정도 걸렸다. 가고시마항구에서 배를 타자 사쿠라지마가 한눈에 들어왔다. 연초에도 대규모 분화를 한 활화산이다. 2월 26일 낮에도 검은 연기가 정상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태평양의 바닷물은 에메랄드빛으로 부드러웠고, 바다 위로 수십 미터 날아가는 날치를 만났다.
야쿠시마는 완연한 봄이었다. 인천공항 출발 직후 하늘에서 본 서울과 수도권은 하얀 눈세계였다. 비행기와 배를 타고 도착한 야쿠시마는 푸른 신록에다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세계였다. 야쿠시마는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스미반도에서 60㎞ 남쪽에 있는 외딴섬이다. 면적은 504.29㎢로, 제주도의 4분의 1 크기다. 섬이 작은데도 해상으로 불쑥 솟아오른 2000m급 미야노우라다케를 비롯한 고산이 즐비해 ‘해상 알프스’로 불린다. 연평균 강우량이 5000~7000㎜에 달해,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필자가 머문 4일 동안 하루몇 차례나 비바람이 몰아치다가 맑은 하늘이 보이는 등, 일기가 급변했다.
야쿠스기 원시림 속으로 들어가다
미야노우라항구에서 차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산속으로 들어가니 풍경이 급격히 달라진다. 좁은 산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니 수령 3000년이 넘는다는 야쿠스기가 나타났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거목이 서 있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야쿠시마 최대 그루터기가 있다. 400여 년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 당시 벌채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고, 어느 곳에서도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트 형태로 보여 관광객이 즐겨 찾는 장소다.
차를 타고 임도를 돌다 보니 해발 1000m 지역에 야쿠스기랜드가 있다. 야쿠스기 거목이 곳곳에 살아 있어 오랜 세월을 이겨낸 강하고 깊은 생명력이 그대로 느껴진다. 센넨스기, 쿠구리스기, 부츠다스기 등 다양한 이름이 붙은 삼나무가 눈길을 끈다. 산속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기겐스기, 가와카미스기 등으로 이름 붙여진 수령 2000~3000년 정도의 삼나무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야쿠시마는 섬 전체가 거대한 산맥이다. 섬 중앙부 가장 높은 산이 미야노우라다케(1936m)로, 일본 백명산에 들어간다. 등산로 입구에서 정상까지 다녀오려면 20㎞ 이상에 달해 산장에서 자면서 1박 2일 강행군을 해야 한다. 아쉽지만 정상 등정은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배경으로 유명한 시라타니운수이계곡을 찾았다. 이곳으로 가려면 해발 1000m 공중 전망대인 ‘타이코이와(바위 정상)’를 지나야 한다. ‘원령공주’에서 늑대 엄마가 휴식을 취한 바로 그 힐링 장소다. 야쿠시마의 거대한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일본 대표 폭포와 야생 동물을 만나다
야쿠시마는 미야노우라다케를 중심으로 산세가 깊어 손꼽히는 명승지가 많다. 오코노폭포는 ‘일본 폭포 100선’에 뽑힌 폭포다. 낙차가 88m에 달하고 수량이 엄청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져 떨어지는 모습이 장쾌했다. 센피로폭포는 폭 200m의 거대한 화강암 통반석에서 흘러 떨어지는 낙차 60m의 박력 있는 폭포다. 이들보다 낙차는 작지만, 산에서 바다로 곧바로 떨어지는 토로키폭포가 특히 절경이었다.
야쿠시마의 산길에서는 종종 야생 야쿠시마 원숭이나 야쿠시카(사슴)를 볼 수 있다. 2월 28일 산길을 천천히 가다가 양지 쪽에서 평화롭게 햇볕을 쬐는 원숭이 가족을 만났다. 그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낯선 이방인을 쳐다본다. 야쿠시카는 조심성이 많아서인지, 이번 여행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아열대 바다와 해양온천
야쿠시마는 아열대 지역에 속해 연중 해수욕이 가능한 휴양지다. 해안도로를 다니다가 잠시 들른 쿠리오하마에서 일행들과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이곳은 붉은바다거북의 상륙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5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바다거북의 산란을 견학할 수 있다.
히라우치해양온천은 아주 특이한 온천이다. 바다에서부터 온천수가 솟아 나온다. 낮에는 먼 태평양을 조망하며, 밤에는 파도 소리를 듣고 쏟아지는 별을 보며 온천을 즐길 수 있다. 입구 간판에 남녀 모두 맨몸으로 입욕해야 한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우리 일행이 들어서자 현지인 부부와 아이, 3인 가족이맨몸으로 온천을 하다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단란한 가족의 평화를 깨는 듯해 미안했다.
야쿠시마에서 4일간 머문 뒤 2월 29일 섬을 떠났다. 불을 뿜는 사쿠라지마를 지나 해상으로 불쑥 솟아오른 고산과 변화무쌍한 날씨, 수천 년이 넘은 야쿠스기와 야생동물을 만났다. 일본 본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섬이지만,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아주 색다른 ‘일본’을 체험했다. 영원한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왜소함이 다가온 짧은 여행이었다. 야쿠시마가 ‘신비의 섬’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PLUS POINT
야쿠시마 이해하는 5대 키워드
1|야쿠스기 야쿠시마 하면, 야쿠스기(屋久杉)가 먼저 떠오른다. 이 섬의 해발 500m 이상에 분포하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야쿠시마 고유 삼나무를 지칭한다. 수령 1000년 미만 삼나무는 ‘고스기(小杉)’로 불린다. 야쿠스기 가운데 추정 수령 2000~7000년 삼나무를 지칭해 ‘조몬스기(繩文杉)’라고 한다. 조몬은 일본의 신석기시대에서 기원전 1만4900~3000년 기간을 가리킨다. 야쿠스기는 성장이 매우 느리기 때문에 잘 썩지 않아 중세 시대부터 귀중한 목재로도 활용됐다. 현재 벌채는 금지돼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야쿠스기의 추정 수령은 7000년 정도다. 줄기는 깊은 주름과 혹으로 덮여 있어 보는 순간 큰 감동이 느껴진다.
2|이끼 숲 야쿠시마의 숲은 녹색으로 물든 세계다. 그 깊고 선명한 녹색의 정체는 나무나 바위에 번식한 약 600종에 달하는 이끼다. 화강암으로 형성된 야쿠시마는 연중 내내 쏟아지는 비 덕분에 계곡에 물이 넘쳐나고, 이끼 숲과 어울려 묘한 정취를 뿜어낸다. 숲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기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배경인 시라타니운수이계곡을 만난다. 서부 임도의 숲길은 드라이브도 가능하다. 미야노우라가와, 안보가와 등의 계곡에서 카누도 즐길 수 있다.3|한 달에 35일 비 야쿠시마에는 ‘월평균 35일 비가 온다’는 말이 있다. 고저 차가 큰 원뿔형의 섬 지형에다 쿠로시오해류를 타고 들어오는 온난 습윤한 바람이 많은 비를 몰고 온다. 혼슈(본섬)에 비해 강우량이 배를 넘는다. 연평균 강우량은 평지 4500㎜, 산지 7500㎜에 달한다. 풍부한 물 덕분에 깊고 아름다운 생명의 숲이 태어났다. 숲에서 정화된 빗물은 맑은 물이 되어 섬을 돌고,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섬의 얇은 표층을 깎아내며 폭포가 되어 바다로 나간다.
4|해상 알프스 섬 중앙에 있는 규슈 최고봉 미야노우라다케를 중심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이 즐비하다. 섬 정상은 연중 내내 거의 구름으로 뒤덮여 보기 어렵지만, 맑은 날은 ‘해상의 섬’으로 부를 만하다. 정상에 올라가 운해로 지는 산촌 마을을 바라보는 경치는 감탄을 자아낸다.
5|원숭이와 사슴 천국 야쿠시마에 사는 야생 원숭이와 사슴은 각각 3000마리 정도다. 사람은 1만여 명이 거주한다. 섬 곳곳에서 만나는 원숭이는 ‘야쿠자루’로 불리는 일본 고유종이다. 니혼자루(일본원숭이)의 한 종류로, 본섬에 사는 원숭이와 기본 습성은 같다. 무리 수는 30여 마리 정도로 적고, 몸집이 작고 털이 긴 게 차이점이다. ‘야쿠시카’로 불리는 사슴도 야쿠시마 고유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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