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참가자들이 기다린 ‘고도’는 무엇이었을까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얼마 전 신구·박근형·박정자 등 전설적인 노(老)배우들이 열연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다. 예전에 본 공연들에서는 중년 배우들이 상황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해 ‘데드팬(무표정하고 건조함)’으로 연기를 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더 오랜 세월 ‘고도’를 기다려왔을 노배우들이 더 서글프고 피로하고 그럼에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느낌으로 연기를 해서 애틋한 맛이 있었다.
연극은 두 나이든 남자가 ‘고도(Godot)’라는 미지의 인물을 기다리지만, 그는 언제나 ‘내일 오겠다’는 말만 전할 뿐이고 기다림이 계속된다는 내용이다. 작가 베케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썼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에서 지하저항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단체가 발각되는 바람에 미점령 지역인 외딴 시골로 피신했다. 거기에서 전쟁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다른 피란민들과 실없는 잡담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때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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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레지스탕스 경험 담긴 희곡
‘고도’는 해방과 온갖 동경 상징
3·1운동도 여러 동기의 복합체
근대적 시민 탄생 운동으로 봐야
」
시공간을 초월하는 ‘고도’의 의미
그렇다고 고도가 종전과 나치 패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종전 후에 나왔고 베케트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고도는 정녕 누구란 말인가? 이 극을 처음 ‘부조리극’이라 부른 영국의 연출가 에슬린은 이런 말을 했다. 1960년대 폴란드 관객은 고도가 소련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했고, 알제리 농부들은 고도가 공염불이 된 토지개혁이라고 생각했다고.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해 각자가 처한 현실에 대입이 가능하다는 점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매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105년 전 이맘때, 이 땅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고도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고도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이 전국적 조직이나 지도자도 없이, 요즘 같은 통신망도 없이, 동시다발적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오게 된 것일까? 권보드래 교수의 『3월 1일의 밤』(2019)에 따르면 당시 일제의 통계로도 3·1운동 참가자 수가 60만~100만 명으로 조선 인구의 3.7~6.2%에 달했다.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혁명의 연대였지만 3·1운동만큼 자발적인 동시에 전국적인 봉기 양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권 교수는 말한다.
권 교수도 처음에는 3·1운동을 존경해야 하지만 “식상한 대상”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당시의 신문 조서를 읽고는, 그 “미추(美醜)가 분간되지 않는” 신선하고 입체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조서 속 사람 중 어떤 이는 독립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우기기도 했고, 이미 독립이 된 줄 알아서 만세를 불렀다는 사람도 많았고, 만세를 불러야 나중에 한자리 얻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바로 그 사람들이 손가락 잘라 피를 내어 독립만세기를 만들었고 (…) 총 맞아 이웃이 죽었는데도 다음날 또 헌병주재소를 향해 행진해 가고 있었다.” 그 후 다양한 자료를 섭렵해 3·1운동의 면모를 교과서에 나오는 ‘항일 민족운동’을 넘어선 입체적 모자이크로 엮은 책이 『3월 1일의 밤』이다.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동기와 목적으로 3·1운동에 나섰다.
뜨거운 열기 뒤 엇갈린 동기
1919년 1월에 승하한 고종에 대한 추모 열기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열기의 이유는 각자 달랐다. 조선 왕정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면에 “황실이라면 자다가도 이가 갈리고 (…) 왜놈 미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그들은 오히려 왕정으로 되돌아갈 염려가 없어졌기에 마음 놓고 애도했다.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 또한 “비록 오랜 전제정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의 오늘로 이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조선 왕정과의 결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당시 한국인들은 1919년 1월 시작된 파리평화회의와 거기에서 나온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심지어 황해도 어느 촌의 농민도 “세계평화회의가 열려 타국에 점령당한 약소국은 빠짐없이 독립하고 있다”고 면장에게 말했으며 부녀자도 “민족자결”을 입에 올렸다는 것을 당시의 기록이 전하고 있다. 독립이 되면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엇갈렸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론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것이 3·1운동의 중요한 점이다.
권 교수의 책을 기자에게 추천해준 사회학자 송호근 한림대 석좌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 수준에서 근대로 (근대적 시민으로) 탈각해서 나오는 데에는 여러 가지 계기가 필요하다. 당시에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하나는 (시민 종교의 구실을 한) 천도교와 기독교, 그다음에 사람들이 즐겨 읽은 신소설, 그다음에 독립과 시민 자치를 위한 운동들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시민 자유를 짓밟으니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 세 가지 계기가 3·1운동으로 모인 것이다. 시민으로 각성하는 운동, 시민으로 전환하는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송 교수의 『국민의 탄생』(2020)을 보면, 일제가 공론장을 제거한 상태에서 종교와 신소설이 어떻게 그것을 보완했는지 나와 있다.
3·1운동에는 여성운동도 녹아있다. 장영은 성균관대 초빙교수에 따르면, 독립운동가 이아주는 정신여학교 졸업반이었던 1919년 3월 5일 다른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기소되는데,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웬 정치에 상관을 하느냐? 아직 조선 여자는 정치에 상관할 정도가 못 된다. 너희는 지금 겨우 가정이나 개량하고 자녀나 잘 양육하거라”라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생각하야도 이가 갈리는” 분노를 느꼈다고 한다. “3·1운동은 민족 운동의 차원을 넘어서서 여성들이 여성의 삶 자체를 근본적으로 고민하도록 만든 혁명적 사건이었다. (…) 여성들은 서로 연대하기 시작한다”라고 장 교수는 말한다.
이처럼 3·1운동은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 소망을 폭발시키며 근대적 시민으로 거듭나기 시작한 운동이었다. 여전히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을 주는 이유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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