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문화·남녀 접촉 금지…조선 왕비 '얼굴'이 사라진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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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정면을 바라보는 근엄한 모습이다.
한희숙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조선 초기까지 왕비의 초상화가 그려졌으나, 15세기 중후반부터 그려지지 않았고 현재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이어 그는 "조선 건국 후 남성과 여성의 접촉을 금하는 규제인 '내외법'이 점차 심화하면서 남성 화원(畵員·도화서에 소속돼 그림 그리는 사람을 뜻함)이 왕비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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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인현왕후 초상화 시도했으나 '좌절'…"왕비 얼굴 알 수 없어"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는 정면을 바라보는 근엄한 모습이다.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袞龍袍·가슴과 등, 어깨에 용의 무늬를 수놓은 왕의 옷)를 입은 태조의 모습은 여러 점을 그려 특별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왕의 초상화는 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그 자체로 권위를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비는 어떠할까. 현재 얼굴이 알려진 왕비는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이자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재위 1907∼1910)의 비인 순정효황후뿐이다.
한희숙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조선 초기까지 왕비의 초상화가 그려졌으나, 15세기 중후반부터 그려지지 않았고 현재는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25일 학계에 따르면 한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내는 학술지 '장서각' 최근호에 실은 논문에서 조선시대 왕비 초상화 제작 실태를 분석하며 이같이 밝혔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따라 왕비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에는 숭불 사상의 영향으로 왕과 왕비의 진영을 각종 사찰이나 원당(願堂·세상을 떠난 왕과 왕비의 명복을 빌던 사찰)에 봉안해 천복을 빌었다"고 짚었다.
그는 "조선을 건국한 뒤 왕명으로 가장 먼저 그려진 왕비의 초상화는 태조의 두 번째 부인으로 4년 동안 왕비로 살았던 신덕왕후의 것으로 짐작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덕왕후의 초상을 (신주를 모신) 인안전에 봉안했다'는 1398년 태조실록 내용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보면 신덕왕후가 죽은 후에 그린 그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덧붙였다.
한 교수는 신덕왕후를 포함해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정종(재위 1398∼1400)의 비인 정안왕후 등 6명의 초상화가 그려진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왕비의 초상화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은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했다.
한 교수는 "성리학적인 유교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제사에서도 불교식 초상화를 신주가 대신하게 됐다.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1474년 이후에는 초상화 전통도 맥이 끊어지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조선 건국 후 남성과 여성의 접촉을 금하는 규제인 '내외법'이 점차 심화하면서 남성 화원(畵員·도화서에 소속돼 그림 그리는 사람을 뜻함)이 왕비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게 됐다"고 덧붙였다.
왕비의 얼굴을 남기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교수는 조선의 제19대 왕인 숙종(재위 1674∼1720)이 "과거 끊어진 조선의 전통을 잇는 일이자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작업"으로서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숙종은 고려에 이어 조선 초기까지 이어지던 왕과 왕비의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제작과 봉안을 실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추고 있었지만 끈질긴 반대 상소로 뜻을 거두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내외가 극심했던 당시 유교적 관념에서는 신하가 감히 중전의 얼굴과 몸을 바라보고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로 간주했다"고 배경을 추론했다.
몇 점 남지 않았던 조선 왕비의 초상화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모두 사라진 상태다.
한 교수는 "왕비의 초상화는 1474년 이후 그려지지 않았고, 성리학적 사상·의례가 심화하면서 왕비 얼굴을 그리는 것은 금기시됐다. 그 결과 조선 왕비의 얼굴은 전혀 알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y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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