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 유치 실패 막전막후'…속인 國, 속은 國, 이상한 國
중학교 다니던 시절 중간·기말고사를 치고 나면 성적표가 나오기 전 '오징어 다리'라고 부르는 가성적표를 나눠줬다. A4 종이를 길게 나눠 잘라 오징어 다리처럼 생긴 한 줄짜리 성적표여서 그렇게 불렀다.
'50~60'
우리 정부와 부산시가 2030엑스포 개최지 결정일에 임박해 받아 든 '오징어 다리'의 점수는 50~60개국이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 같은 가성적을 매긴 근거는 있었다.
유치위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외교 서한을 보내거나 국가 정상급 인사의 구두를 통해 우리나라에 대한 지지를 약속한 국가의 수가 최소 50개국은 넘었다.
정부는 50개국 이상은 확보했다고 판단하고 2차 결선투표를 염두에 둔 교섭 전략에 집중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이탈표와 1차에서 탈락할 이탈리아 로마 표를 흡수해 대역전극을 쓴다는 시나리오였다.
'29'
우리가 받아 든 공식 성적표에 적힌 점수는 '오징어 다리' 점수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29개국이었다.
엑스포 개최지 결정 역사상 첫 역전극은커녕, 3국 이상 경쟁 구도 중 처음으로 1차 투표에서 승부가 나버리는 기록의 들러리 역할을 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외교적 상식을 벗어나는 국제박람회기구(BIE) 회원국들의 투표가 근간에 있을 것이다. 20개국 이상이 무기명 투표 방식 뒤에 숨어 외교적 약속을 저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나마 일부 국가는 개최지 결정일이 임박해 우리 정부에 양해의 뜻을 전해 온 것으로 알려진다. 사우디의 물적 지원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우리에게 표를 주기 어렵게 됐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우리와 외교적 약속을 하고 사우디를 찍은 것으로 보이는 대다수 국가는 이렇다 할 메시지조차 보내오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외교관으로 활동한 유치위 한 관계자는 "국가 간 약속이 이렇게 가볍게 다뤄지는 것은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처음 목격한다"며 "저로서도 충격적인 일"이라고 했다.
낌새는 있었다.
개최지 결정이 임박해 우리 지지를 선언했던 국가 중 일부가 우리 정부와 부산시의 연락을 피하거나 약속을 주저한 것으로 알려진다.
파리 현지에 갔던 부산시 한 관계자는 "우리를 지지했던 국가인데, 이상하게 약속을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투표 결과를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정부와 부산시는 '설마?' 하는 의구심에도 상식을 기반에 둔 외교적 약속을 믿고 표 확장에 집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외교적 약속보다는 해당 국가의 물밑 움직임에 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제계는 이 같은 회원국들의 표심 흐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사우디의 기존 외교 상식을 깬 유치전도 우리 '오징어 다리' 점수를 머쓱하게 만든 요인으로 지목된다.
오일머니를 등에 업은 사우디의 대규모 지원을 통한 표심 확보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5차 경쟁 프레젠테이션(PT)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물적 지원 약속에 할애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사우디는 여기에 더해 외교 관례를 깨는 이상한 행보를 전개했다.
표 단속을 위해 각국 외교 장관급 인사를 파리 파견을 요청한다거나, 파리에 온 각국 대표들을 밀착 마크하며 우리와의 접촉을 차단 시킨 것으로 알려진다.
개최지 결정 당일 총회장에서는 우리 유치단 주요 인사 앞을 의도적으로 가로막으며 막판 표심 호소를 방해하기도 했다. 모두 그동안의 외교 관례에서 벗어난 행위들이다.
2030부산엑스포 유치 열망이 꺼져 버린 결과를 부정할 순 없다.
외교적 약속을 저버린 국가들을 원망해야 할지, 그들의 약속이 표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은 우리의 안이함을 자책해야 할지, 상식 밖 유치전을 전개한 사우디를 탓해야 할지. 그건 각자 판단의 몫이다.
다만, 이번 엑스포 유치전을 계기로 우리가 알고 있던 국가 간 외교 통념에 금이 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엑스포 유치 실패는 뼈아프게 실망스럽더라도 결국에는 털고 일어나면 된다.
하지만, 국제 정세를 제대로 못 읽어 벌어진 외교 정보전 패배는 보다 깊이 있는 자성과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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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CBS 박중석 기자 jspar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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