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매일 부산인구만큼 지옥 거친다 [출퇴근지옥①]

한영익, 윤정민, 심석용, 김홍범, 김민정, 최서인 2023. 8. 22.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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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문제가 된 출퇴근지옥

「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노른자)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 저녁이 없어”
장거리 출퇴근의 애환이 깔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대사 중 일부입니다. 매일 2329만명 출퇴근을 합니다. 30분 내 출근자는 1128만명으로 절반도 안됩니다. 김포골드라인의 살인적 혼잡률(285%)이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지만 ‘출퇴근지옥’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중앙일보는 서울시의 통신기지국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근 1번지’ 6개 동(서울 여의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을 선정했습니다. 이후 출근 1번지로 출근하는 인구가 일정 수 이상인 서울·경기·인천의 행정동을 추린 뒤 이 중 통근시간이 가장 긴 곳에 사는 ‘장거리 지역 통근자’와 통근 인구가 가장 많은 곳에 사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동행·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이를 통해 통근거리가 규정하는 이들의 삶을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 5가지 측면에서 따져봤습니다.


출퇴근지옥① : 손풍기 '강' 맞추고 버틴 1시간 반 출근길



“그냥 살아서 가면 다행이라 할 정도에요.”
김포 한강신도시(구래동)에 사는 강희경(43)씨는 매일 겪는 출근길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출근길에 지쳐 2016년 서울 강남에서 여의도로 직장을 옮겼다. 2015년 첫 아이를 출산한 뒤 친정이 있는 경기도 김포로 이사를 했는데, 강남까지 편도 2시간 통근길이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직장을 옮겨 출근 시간은 40분 정도 줄긴 했지만, 지난달 24일 동행한 강씨의 출근길은 여전히 전쟁과도 같았다.
강희경씨는 지난달 24일 출근길에 동행한 취재진에게 “구래역은 골드라인 종점(양촌역) 바로 다음이라 탈 땐 덜 붐빈다”고 했지만 결국 자리에 앉진 못했다. 그는 좌석 기둥에 기댄 채 스마트폰을 보는 것 외의 다른 활동을 하지 못했다. 심석용 기자


오전 7시50분, 초록 블라우스에 검은색 백을 걸친 강씨가 집을 나섰다. 2분 거리인 ‘김포 골드라인’ 구래역 개찰구에 도착하자 형광 조끼를 입은 안전요원들이 “천천히 이동하라”고 안내했다. 승강장엔 10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구래역은 골드라인 종점(양촌역) 바로 다음이라 탈 땐 덜 붐벼요.” 강씨는 이렇게 말했지만, 자리에 앉진 못했다. 좌석 기둥에 기댄 채 그는 조용히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지난달 24일 강씨가 탄 지하철과 환승을 위해 이동하는 역사는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초만원이 된 전철 안에서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휴대전화를 쥔 손을 하늘 위로 높이 든 남성도 등장했다. 심석용 기자


8시23분 열차가 고촌역에 이르자 혼잡률 285% ‘골병라인’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초만원이 된 전철 안에서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을까 봐 휴대전화를 쥔 손을 하늘 위로 높이 든 남성도 등장했다. 객실 안은 냉방 중이었지만, 승객들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8시30분 환승역(김포공항역)에 도착할 때까지 ‘강’에 맞춰둔 손풍기(손 선풍기)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무기였다.

강희경씨는 김포도시철도 구래역 2번출구 앞 메트로타워예미지 아파트에서 서울시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역에 있는 직장으로 출퇴근한다. 김포도시철도와 지하철 9호선을 환승하는 그의 출퇴근 시간은 1시간20분 가량이다. 지난달 24일 강씨가 탄 지하철 9호선 열차와 열차를 잇는 갱웨이 바닥에 한 여성이 지친 모습으로 쭈그려 앉아 있다. 심석용 기자

8시36분쯤 환승한 서울 지하철 9호선 급행열차도 ‘지옥철’인 건 마찬가지였다. 지친 모습으로 열차와 열차를 잇는 갱웨이 바닥에 쭈그려 앉은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강씨는 “7월 소사·대곡선이 개통하면서 더 정신이 없어졌다”며 “출퇴근 시간을 활용하면 좋겠지만, 골드라인이나 9호선에선 뭘 할 수가 없다. 살아서 가면 다행일 정도다”라고 말했다. 강씨는 당산역에서 9호선 일반열차로 재환승한 뒤 9시10분 국회의사당역에 내리고서야 1시간 만에 다시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광고 전단을 힘겹게 뿌리친 강씨는 7분간 걸어 회사 건물에 도착한 뒤에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출근 생각에 전날 밤부터 화가 나는 날이 많아요. 너무 힘들어서 육아시간을 쪼개 억지로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거라도 안 했다면 아마 못 버텼을 것 같아요.” 강씨는 퇴근길엔 혼잡한 전철 대신 버스를 이용한다. 시간은 더 걸리지만 앉아서 갈 수 있어서다.


매일 2329만명 출퇴근, 통근의 사회적 비용 190조원


매일 2329만명이 회사로 출퇴근한다(2021년 국가지도집). 서울에선 10명 중 6명이, 경기도에선 4명 정도가 지하철이나 버스, 혹은 둘 다를 이용한다. 대부분 ‘김포 골드라인’처럼 극심한 혼잡을 뚫고 가는 이들이다. 강씨처럼 1시간 넘게 이동해 회사에 이르는 사람만 356만명에 달한다. 매일 아침 부산시 인구 전체보다 많은 수가 1시간이 넘는 ‘생존 역정’에 오르는 것이다.
김주원 기자

통계청 인구 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통근자 중 편도 30분 안으로 출근하는 사람은 1128만명에 불과하다. 걸어서 직장까지 가는, ‘직주근접’의 꿈을 실현한 건 10명 중 2명(서울 18.2%, 경기 14.1%, 인천 12.3%)이 채 안 된다. 그나마 서울에 살며 서울시로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선 15.3%(2020년 통계청 인구총조사 기준)가 출근에 1시간 이상을 썼다. 하지만 경기도나 인천시 등에서 서울시로 출근하는 ‘광역 출퇴근’ 인원들은 약 39%, 10명 중 4명 정도가 1시간 이상 이동해야 일을 시작할 수 있다. ‘한국의 지역 차에 따른 통근시간과 주관적 웰빙의 연관성(정인철, 2023)'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58분으로 OECD 국가들 평균의 두 배에 달한다. 동시에 한국은 관련 연구의 조사 대상인 23개국 가운데 웰빙지수가 가장 낮고 우울증 유병률이 가장 높다.

차준홍 기자


중앙일보는 서울시 빅데이터인 ‘서울 생활이동 데이터’를 자체 분석해 출근시간대(오전 7~9시) 유입인구가 많은 ‘출퇴근 1번지’(서울 여의도동·역삼동·종로동·가산동·명동·서초동)를 선정했다. 이후 해당 지역으로 출근하는 이들이 일정 수 이상인 지역을 추린 뒤 해당 지역 중 출퇴근 1번지로 출근하는 시간이 가장 긴 ‘장거리 통근자’와 출근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에 살며 가장 보편적인 출근길을 오가는 ‘최다 이동 지역 통근자’ 12명을 만나 각각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결과, 출퇴근 거리가 통근자들의 ①삶의질 ②가족관계 ③건강 ④업무성과 ⑤경제적 상황 등과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관찰됐다. 이들 모두가 ‘출퇴근 시간이 삶의 만족도에 영향을 미치냐’는 질문에 “매우 영향을 미친다”(10명)라거나 “영향을 미친다”(2명)고 답했다. 통근 때문에 포기한 것을 묻는 질문엔 여가나 운동, 아침 식사 등을 포기했다는 답이 나왔고, 가족이 있는 통근자들은 ‘가족과의 시간’이나 ‘아이들 식사의 질’을 포기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업무 관련 공부를 하거나 자기계발을 하는 건 꿈도 못 꾼다”는 이도 있었다. 통근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2019년 190조원,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과 2021년 역시 170조원 이상이라는 민간 연구단체(LAB2050)의 조사 결과도 있다.

김경진 기자

골드라인·9호선만 지옥은 아니다…일상이 된 출퇴근 고통


도로망은 확충되고 지하철은 거미줄처럼 늘어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직장인들의 출퇴근 길은 갈수록 험난해지고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이 오히려 감당 가능한 출근 거리의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수도권’이 넓어지고, 통근자들의 직장과 집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근자 수가 1720만명(2000년)에서 2329만명(2020년)이 되는 동안, 1시간 이상 통근자 비율도 14.5%에서 15.3%로 늘었다. 골드라인·9호선 같은 유명한 혼잡노선 이용객이 아니라도 출·퇴근 고통은 점점 일상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달 13일 오전 3시50분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장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엔 143번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버스가 출발한 이후 이른 시간에도 차 안은 곧 만석이 됐다. 김홍범 기자


출·퇴근의 고통이 ‘러시아워’에 국한되는 것만도 아니다. 지난달 13일 오전 3시50분쯤,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장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캄캄한 새벽 사이로 김모(74)씨가 “버스 금방 와요. 4시 되면 딱 올 거야”라며 말을 건넸다. 그는 143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매일 새벽 4시 첫차를 타고 43개 정류장을 거쳐 20㎞ 이상을 이동한다. 내리는 곳은 삼성역. 그의 출근은 버스에서 내린 뒤 10여 분을 더 걸어 일터인 빌딩에 도착해서야 끝이 났다. 23년, 혹은 24년째다.

“직업이랑 이름? 우리 같은 사람 이름 알아서 뭐해. 그냥 새벽에 나가서 빌딩 청소하고 해요. 2000년부턴가. 이제 헷갈리네. 매일 하니까 이제 힘들 게 뭐 있겠어요.” 김씨의 말이다. 이른 새벽 한적한 도로를 누비지만, 김씨의 출근 시간은 언제나 1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는 “퇴근할 땐 2시간 넘게 걸린다. 그게 싫어서 3번 갈아타고 다른 길로 집에 오는데, 갈 땐 그래도 편한 거다”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전 4시에 첫 운행을 시작하는 143번 버스는 2022 국토교통부 대중교통 현황 조사에서 하루 평균 3만5000명 이상이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김홍범 기자


이윤석 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 교수는 “사람들이 직장 생활이 아닌 개인적 삶을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면서 직주근접에 대한 욕구도 커지고 있지만 각종 정책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수많은 정책이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는 데 실패해 왔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한영익·윤정민·심석용·김홍범·김민정·최서인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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