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케인스주의 다 써본 일본, 다음 부활 카드는 ‘반도체 공급기지’

방현철 경제부 차장·경제학 박사 2023. 7. 2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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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철의 경제로 세상 읽기]
일본 경제 35년 전문가 이지평이 본 부활 전략

올해 일본 증시가 뜨겁다. 일본 대표 지수인 닛케이225는 지난달 33년 만에 처음으로 3만3000선을 넘어서기도 했다. 1990년대 초 버블(거품) 경제 붕괴 후 시작된 ‘잃어버린 30년’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 증시 10년 주기설’도 나온다. 신자유주의식 개혁을 추진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2001~2006년 재임) 총리 때나 케인스주의식 경제 살리기에 나섰던 아베 신조(2012~2020년 2차 재임) 총리 시기에도 한때 증시가 뜨거웠고 ‘일본 경제 부활’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뒷심이 부족했다. 이번엔 정말 일본 경제가 30년 불황을 탈출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국내에서 1980년대 말부터 35년간 일본 경제를 분석해 온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를 만나 일본의 장기 불황 탈출 전략과 한국 경제에 주는 교훈을 짚어봤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지난 14일 본지 인터뷰에서 최근 일본의 장기 불황 탈출 전략에 대해 "일본은 미중 갈등 속에서 기회를 노려 중국을 대체하는 ‘첨단기술 하드웨어 공급기지’가 되겠다고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완중 기자

- 지금 일본 경제에 부활 신호가 있나.

“일본 경제 전문가들은 성장률 측면에서 두 가지를 얘기한다. 우선 그동안 경제 기초 체력이라 할 수 있는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쳤던 성장률이 이제는 그보다 높다는 것이다. 올해 1%대 성장을 내다보는데, 이는 0.5~0.7%로 추정되는 잠재성장률보다 높다.(일본은 2019~2020년 마이너스 성장을 하다, 2021년 이후 3년 연속 1% 넘는 성장을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취업자 1인당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이 다른 선진국보다 높다는 것이다. 작년 취업자 1인당 GDP 성장률은 미국이 -1.4%, 독일은 -0.7%, 프랑스는 0.3%였는데 일본이 0.9%였다. 노인이 많아 통상 성장률은 낮지만, 취업자 대비로 따지면 다른 선진국보다도 성장세가 눈에 띈다는 것이다. 다만 2025년엔 성장률이 다시 0%대로 떨어질 수 있다고 보는 전문가도 적지 않다.”

- 고이즈미 때도 ‘일본 부활’이라는 말이 있었다.

“고이즈미는 부실 채권 문제를 해결하고, 규제를 완화했다.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개혁이었다. 기업 구조 조정을 통해 일본 기업들의 수익성 회복 계기를 마련했다. 길게 보면 일본 주가의 바닥을 다진 건 고이즈미 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구 감소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그 정도론 일본 경제를 회생시키지 못했다.”

- 아베노믹스 때도 일본이 들썩이지 않았나.

“아베는 ‘2% 성장, 2% 물가’를 목표로 했지만 ‘1% 성장, 1% 물가’를 만들었다.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엔저(円低)와 재정 풀기, 그리고 구조 개혁이란 ‘세 화살’로 디플레이션 탈출을 모색했다. 재정과 통화를 풀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뉴케인지언(새 케인스주의 경제학파)에 바탕을 뒀다. 하지만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아베 정권 초기 주가가 급등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아베노믹스 ‘세 화살’ 중 셋째인 구조 개혁은 잘 안 됐고 성장이 다시 주춤해졌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기시다의 ‘새로운 자본주의’ 전략

- 기시다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들고나왔다.

“2021년 집권한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 전략은 구체화되는 중이다. 핵심은 중산층을 직접 지원해 두껍게 하고, 산업 정책도 동원한다는 것이다. 공급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현대 공급 측 경제학(Modern supply-side economics)’과 연결된다. 고이즈미는 규제 완화, 아베는 기업 감세를 하면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소비와 시장이 없으니 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았다. 기시다의 전략은 물가가 올라가면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소비를 자극해 기업들이 일본 국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이란 그림이다. 현재로선 글로벌 인플레이션 영향으로 물가가 올랐고,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는 정도까지 진행됐다.”

- 미국 ‘바이드노믹스(바이든 대통령의 경제정책)’와 개념이 비슷해 보인다.

“바이드노믹스는 미국 중산층을 두껍게 하고 반도체 등 미국 내 산업을 부흥시키려고 하는데, 바탕에 깔린 생각은 유사하다. 외국 기업 투자 유치를 위해 보조금을 강화하는 것도 비슷하다. 과거 일본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를 부흥시키려고 일본 기업들끼리 ‘올 재팬(all Japan)’ 전술로 통합했다. NEC, 히타치, 미쓰비시의 메모리 반도체 부문을 통합해 엘피다를 만든 게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대만 TSMC나 미국 인텔을 일본에 유치하겠다고 나선다. 미국처럼 외국 기업도 활용하자는 식으로 바뀌었다.”

- 일본은 미·중 갈등 속 기회도 찾는 것 같다.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은 앞서 미소 냉전 시대에 기회를 잡았다. 미국에서 첨단 기술을 받아서, 아시아의 공급 기지 역할을 했다. 6·25전쟁, 베트남전쟁에서도 그랬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미·중 마찰 속에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동맹국 중심 공급망을 강화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일본은 이에 호응하며 반도체 등의 부활 전략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예컨대, IBM이 개발한 2나노급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일본 기업 연합으로 설립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서 이전받고 있다. 미·일은 반도체, 배터리 등 첨단 기술 제품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을 낮추려 하고 있다. 일본은 그 기회를 노려 중국을 대체하는 ‘첨단 기술 하드웨어 공급 기지’가 되겠다는 것이다. 미·중 갈등 사이에서 ‘어부지리(漁夫之利)’ 기회를 탐색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업체 라피더스의 도쿄 본사에 있는 라피더스의 로고. /로이터 뉴스1
그래픽=송윤혜

◇일본의 해외 거점 전략

- 일본은 1990년대 중국 부상에 대응해 수출 구조를 바꾸지 않았나.

“산업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다. 전자 산업은 TV 등 완제품의 일본 공장 생산 라인이 거의 사라지고 소재, 부품, 장비 수출 중심이 됐다. 하지만 자동차는 도요타그룹이 300만대 생산을 일본 내에서 유지하고 있다. 다만 자동차의 해외 생산 거점을 늘리고 있다. 섬유 산업은 의류, 직물의 공동화가 심화됐지만, 도레이 등이 첨단 섬유 원료의 일본 내 경쟁력을 유지했다. 그 결과 글로벌 생산 체제를 갖춘 유니클로가 히트텍을 개발해 전 세계 히트 상품으로 만드는 성과를 거뒀다. 일본 기업들의 해외 생산 거점의 연간 매출액은 241조엔으로 일본의 한 해 수출 65조엔의 3.7배나 된다.”

- 일본은 내수가 큰데, 수출 전략이 의미 있나.

“일본은 작년 GDP 대비 수출 비율이 19.8%이고, 내수는 80% 가까운 내수 중심 경제 구조다. 그렇지만 수출이 있어야 기업 생산성을 높이고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과거 일본에 첨단 공정과 제품 개발 거점만 남기고 양산은 해외 거점에서 하겠다는 전략도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의 제조 강점은 생산 공정 개선에 있기 때문에 제조 거점이 해외로 빠져나가면 이런 강점을 살리기 어렵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일본에선 최근 반도체를 다시 잘 만들어봤자, 스마트폰 산업이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나온다. 이제 일본으로선 기존 수출 주력이었던 전기·전자, 자동차, 기계, 화학 등을 어떻게 부활시킬까가 중요해졌다. 디지털화, 그린화로 혁신을 만들어 활로를 찾겠다는 전략이다.”

◇한국이 참고할 일본 전략

- 한국은 수출 비율이 크다. 일본 부활 전략을 참고하기 어렵지 않을까.

“일본은 내수가 크다 보니 고령화 충격이 컸다. 고령화로 각종 소비가 감소 압력을 받고, 사회 보장을 위한 재정 부담이 커졌다. 기업들도 인력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투자를 피하게 됐다. 90대가 부품 기업 현장에서 일하기도 한다. 일본은 수출만으로 침체 방어가 쉽지 않다. 반면 한국의 GDP 대비 수출 비율은 작년 48.3%를 기록할 정도로 크기 때문에 제대로 된 수출 전략을 짠다면 고령화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경제 안보 시대다. 과거 중국에 중간재를 공급하는 것 위주의 수출 전략은 재검토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면서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 일본의 중산층 살리기는 한국에 참고가 될까.

“중산층 재산 형성과 주식 투자를 연결한 건 주목할 만하다. 주식 소액 투자에 대해 비과세하는 NISA(개인저축계좌)를 2014년 도입했다. 부동산이 아니라 주식으로 재산을 형성하게 도와준다는 것이다. 증시 상승이 소비 증가, 그리고 기업 투자 증가로 선순환될 수 있다. 다만 두 나라 상황이 다른 것도 있다. 일본은 20년 이상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일본 정부가 기업에 임금 인상을 강력하게 독려하고 있다. 계속 임금이 상승해 온 한국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임금 인상 독려’ 정책이 일본에선 나오는 것이다.”

- 고령화는 계속 일본 성장의 걸림돌이 아닌가.

“일본에선 ‘70세 현역 시대’라고 한다. 앞으로 ‘75세까지 일하고 소비하자’로 바뀔 것 같다. 고령화는 소비와 투자를 늘리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 성공 사례만 찾을 필요는 없다. 고령화 때문에 실패한 사례가 없는지 파악하면서 일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지난 14일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일본 경제 연구는 일본 경제의 부침에 따라 유행을 너무 탄다"고 했다. /주완중 기자

- 한국에서 일본 경제를 연구하는 애로점은.

“일본 경제 부침에 따라 유행을 너무 탄다. 1980년대 말엔 ‘잘나가는’ 일본 경제만 연구하면 됐다. 당시 ‘일본과 독일,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나’라는 책도 냈다. 그런데 일본 경제가 침체하면서 ‘중국도 같이 봐라. 동남아시아도 봐라. 에너지 산업도 봐라’ 같은 요구를 들었다. 그러다 일본 경제가 반짝하면 다시 관심이 늘었다. 점차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일본 기업들이 한국 연구자들을 경계하는 것도 부담이 됐다.”·

☞이지평 교수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호세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1988년 LG경제연구원에 입사해 33년간 근무하면서 수석연구위원, 미래연구팀장, 에너지그룹장 등을 거쳤다. 현재는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에서 일본경제론, 한일 경제 관계, 일본 기업 경영 등을 가르치고 있다. 일본어 강의도 한다. 2004년부터 ‘재팬 인사이트’란 일본 경제 연구 전문지를 내고 있다. 실무에서 잔뼈가 굵은 현장형 경제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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