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 '1300억 배상'에 삼성 이재용 대신 '기업사냥꾼' 엘리엇 비판
엘리엇 1300억원 지급 판정에 한국 정부 불복 '취소소송'
다수 신문 엘리엇 주장 근거된 국정농단 수사에 불만 표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사건 시초, 흐려진 삼성 책임론
삼성 승계작업 대신 '투기자본' 엘리엇 행태 비판에 초점
언론 프레임 싸움 속 일반투자자 피해는 가려져
[미디어오늘 박재령 기자]
'엘리엇 배상' 판정이 나온 지 28일 만에 정부가 취소소송을 제기하면서 1300억 원 규모의 손해배상 지급 여부가 뒤로 밀리게 됐다. 외국계 투기자본에 국민 세금이 들어갈 우려가 생기자 여론을 의식한 언론의 프레임 싸움도 치열하다. 시민단체는 '정경유착'이 본질이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책임을 주장했지만 다수 신문은 미국계 사모펀드 엘리엇의 행태를 비판하는 데 힘을 썼다. 수천억 규모의 지급액이 예상됐지만 정부가 '잘 싸웠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언론의 프레임 싸움 속 불법합병으로 인한 일반투자자들의 피해는 가려지는 모습이다.
1300억 배상 근거된 국정농단 수사 의심 품는 신문들, 정부는 '불복'
지난 18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고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 한국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해 손해를 입었다며 제기한 '투자자-국가간 소송'(ISDS)에서 한국 정부가 배상원금과 이자, 법률비용을 포함해 약 130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정이 내려진 것에 정부가 '불복'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지난달 배상금 지급 판정이 나온 이후 국내 언론은 이에 '불복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로 나뉘었다.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는 불복을 통해 투기자본의 공격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승소 가능성이 낮은데 추가비용이 들어 실익이 없고 정경유착 책임자들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일경제는 지난달 26일 사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분별한 해외 투기자본이 한국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여기지 않도록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이라며 “이번 판정 결과대로 배상금을 지급한다면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유사한 ISDS에서도 계속 밀릴 수 있고 세금 낭비가 심해질 수 있다”고 했다.
반면 경향신문은 20일 사설에서 “PCA 중재판정부의 '엘리엇 판정문'을 보면 한동훈 장관이 불복의 근거로 제시한 논리에 이미 정반대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확인된다. 한 장관이 왜 불복한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며 “한 장관은 승산 없는 취소소송을 취하하고, 정경유착 책임자들을 상대로 구상권 청구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불복'에 대한 언론의 시선은 2015년 있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을 어떻게 보냐에 따라 갈린다. 윤석열 대통령이 검사 시절 참여했던 '국정농단' 특검은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합병 과정에서 경영권 승계 협조(국민연금 의결권 행사)를 대가로 뇌물을 제공했다며 유죄 판결을 이끌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2020년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관련 수사에 참여했다. 엘리엇은 이러한 검찰 수사를 주요 근거로 정부의 개입이 기업 손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 것. 정부의 이번 불복이 윤 대통령, 한 장관 등의 검찰 시절을 고려하면 '자기모순'이라는 비판(한겨레)이 나오는 이유다.
불복을 주장한 신문들은 엘리엇의 근거가 된 국정농단 수사 자체에 불만을 표한다. 한국경제는 지난달 24일 사설에서 당시 특검의 기소를 놓고 “합병 관련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만남을 '묵시적 청탁'으로, 100원짜리 동전 하나 직접 받지 않은 대통령에게 '뇌물죄'를 인정하고 적용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거셌지만 대법원은 기소 혐의를 대부분 인정하고 재판을 종결했다”며 “법이 정해놓은 주식 교환 비율대로 이뤄진 합병을 뚜렷한 증거도 없이 정경유착으로 무리하게 몰고 간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동아일보도 지난 12일 <삼성 16억 처벌 대가로 엘리엇에 물어주는 1400억> 논설위원 칼럼에서 “정작 대법원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에 대해서는 무죄가 선고됐다. 국정농단 사건은 한마디로 하자면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표류해버린 사건”이라며 “삼성이 '승계 작업'이란 현안에 대해 잘 봐달라고 청탁하고 뇌물을 준다면 고작 16억 원을, 그것도 마지못해 줬을까라는 의문이 처음부터 제기됐다. 승마 지원 71억 원을 포함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관련 기사 : '엘리엇 1400억 원 배상 누구 탓일까' 칼럼은 한참 잘못됐다]
잊힌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 삼성 대신 '엘리엇' 행태 비판
엘리엇 배상 사건은 엘리엇이 누구인지와 별개로,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추진하면서 벌어졌다. 이에 시민단체는 사건 당사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여연대, 공적연금강화행동 등 시민단체가 지난 19일 개최한 좌담회에서 김은정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작업은 현행법 안에서의 '정상적인 부의 상속'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경제 권력을 동원해 개인적 이익을 위해 수조 원에 달하는 분식을 자행하고, 합병비율 조작 및 합리화를 통해 전체 국민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며 “대통령, 공무원, 회계법인 등 사회 각계 각층에 삼성그룹이 어떻게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지와 함께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보여줬다”고 했다.
하지만 경향신문과 한겨레를 제외하면, 지면 기준 주요 9개 일간지와 3개 경제신문은 엘리엇 배상 관련 보도를 하며 19일 좌담회를 비롯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주장을 인용하지 않았다.
이번 엘리엇 배상 판정 흐름에서 '삼성'은 잘 부각되지 않는다. 이재용, 박근혜 등 국정농단 유죄 판결을 받았던 이들에 대한 책임도 흐릿하다. 뉴스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에서 '엘리엇'을 키워드로 배상 판정이 나온 이후 한 달간 전국일간지 11개와 경제일간지 8개의 보도를 분석한 결과 '삼성'은 가중치 기준 14위로 언급량이 적었다. '이재용'이나 '박근혜'는 순위권에 없었다. 같은 조건으로 '이재용'을 키워드로 검색해도 '엘리엇'은 연관어에 등장하지 않았다.
다수 보도는 오히려 삼성이 아닌 '엘리엇'을 겨냥하고 있다. 엘리엇이 '기업사냥꾼', '투기자본' 등 불량 사모펀드라는 것을 강조했다. 매일경제는 지난달 24일 <해외 투기자본 봉 될라 “엘리엇에 강경 대응을”>, <기업 이어 정부 노리는 투기자본 … 얕보이면 '손쉬운 먹잇감' 전락> 기사를 냈다. 중앙일보도 지난달 29일 <대한민국 조롱하는 벌처펀드>라는 제목의 논설실장 칼럼을 냈고, 동아일보도 지난 12일 논설위원 칼럼에서 “(국정농단 수사가) 세상 끝까지 쫓아가 실현한 정의라기보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입신양명하려다 우물 밖 기업사냥꾼에게 돈 뜯긴 빌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1300억 원을 배상해야 해 전문가들이 사실상 정부 패소라고 지적하는 이번 판정에 대해서도 '선방했다'는 프레임이 나온다. 매일경제는 지난달 21일 <기업사냥꾼 맞서 잘싸운 정부 … 피해규모 부풀린 엘리엇은 굴욕> 기사를 냈다. 세계일보도 같은 날 <“정부, 엘리엇에 690억 배상”…청구액 7%만 인정> 기사에서 “대규모 배상 위기 벗어 '선방'”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 매일경제 독자권익위는 “매일경제를 비롯한 다수 언론이 (엘리엇 판정을 놓고) 사실상 승소라는 식으로 보도를 했다. 청구액 대비 배상 금액 규모가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용 자체가 갖는 무게에 비춰 '선방'했다는 논리는 다소 아쉬웠다”고 지적했다.
언론의 프레임 싸움 속 일반투자자들의 피해는 가려지고 있다. 엘리엇은 한미 FTA에 근거해 대규모 배상 판정을 받았지만 국내법에 근거한 일반투자자들의 소송은 잇따라 패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삼성이 '비밀합의'를 통해 엘리엇에 약 724억 원을 지급했다는 것이 한겨레 보도로 드러나자 일반투자자와의 형평성 문제도 불거졌다. 한겨레는 “삼성물산 공시에 따르면, 약 1172만주를 주당 5만7234원에 사들였는데, 엘리엇 지분(773만주)를 제외한 400만주를 보유했던 주주들은 제값을 받지 못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삼성이 이번 사건을 통해 이득을 볼 여지도 있다. 국정농단 수사 결과를 주요 근거로 했던 엘리엇의 주장에 한국 정부가 불복하면서 이를 이재용 회장 변호 논리에 이용할 수 있다는 것. 지난 11일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복수의 변호사는 “최근 삼성 쪽에서 엘리엇 판정 취소 소송 제기 절차를 문의해 왔다”며 “정부가 취소 소송을 제기하면 이 회장 변호인 쪽이 재판에서 유리한 근거로 활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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