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에 갇힌 ‘보이그룹’… ‘걸그룹’에 왕좌 내주다
앨범만 내도 100만장씩 구매
기획사도 팬덤만 노리고 발매
노래 대신 ‘퍼포먼스’만 강조
히트곡 하나없는 밀리언셀러로
아이브·뉴진스·르세라핌 등
착착 감기는 곡으로 인기몰이
병역문제로 빠진 BTS 자리에
걸그룹이 뉴 아이콘 자리매김
지난해는 K-팝 걸그룹이 처음으로 보이그룹을 압도한 해로 기록됐다. 아이브, 뉴진스 등 데뷔한 걸그룹들이 히트곡을 내며 큰 인기를 모은 데 비해 보이그룹의 성적은 초라했다. 이러한 상황은 새해가 되고 3개월이 지났음에도 변함이 없어 14일 현재 멜론차트 10위권 내에 위치한 보이그룹은 세븐틴의 유닛 부석순뿐이다. 뉴진스의 세 곡 ‘디토’(Ditto)와 ‘오엠지’(OMG), ‘하입보이’(Hype Boy)가 1위를 비롯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스테이씨의 ‘테디 베어’(Teddy Bear)가 새롭게 들어왔다. 방탄소년단(BTS)이 병역 문제로 단체 활동을 중단한 이후 많은 보이그룹이 빈 왕좌에 도전해 왔지만 눈에 띄는 그룹은 보이지 않는다. 팬덤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최근 “13년 동안 보이그룹만 덕질해 왔는데 난생 처음 걸그룹 덕질을 시작한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한 보이그룹 소속 기획사 관계자는 “BTS의 빈자리를 채울 보이그룹이 좀처럼 안 나오고 있어 답답하다”고 했다.
◇히트곡 하나 없는 밀리언셀러… 위기의 보이그룹
본래 ‘보이그룹은 팬덤, 걸그룹은 대중성’이라는 가요계의 오래된 대명제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보이그룹은 위기다. 이 명제가 통용됐던 것은 걸그룹이 보이그룹보다 팬덤이 약하기에 대중성으로 승부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걸그룹 역시 막강한 팬덤을 가졌다. 블랙핑크와 트와이스는 물론 아이브와 뉴진스, 르세라핌 등 신인 걸그룹들도 앨범을 100만 장씩 팔아치우며 밀리언셀러로 기록됐고 블랙핑크는 150만 명을 동원하는 월드투어를 개최할 만큼 강력한 팬덤을 자랑한다.
물론 보이그룹들도 앨범 판매량은 기록적이다. 스트레이키즈는 지난해 앨범 ‘맥시던트’(MAXIDENT)로 300만 장 이상을 판매하며 K-팝 아티스트 사상 두 번째로 단일 앨범 ‘트리플 밀리언셀러’가 됐으며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도 2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하지만 이 그룹들의 약점은 ‘대중성’으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히트곡이 없다. 300만 장 이상이 팔린 스트레이키즈 앨범 ‘맥시던트’의 타이틀 곡은 ‘케이스 143’(CASE 143), 200만 장이 넘게 판매된 TXT 앨범의 타이틀 곡은 ‘슈가 러시 라이드’(Sugar Rush Ride)이나 두 곡 모두 국내 대중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니뮤직에서의 누적 재생수도 각각 591만, 418만 회로 앨범 판매량에 비해 초라하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앨범을 100만, 200만 장씩 판매하며 히트곡 하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정말 기형적인 현상”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팬들은 앨범 안에 담긴 포토카드를 모으고 팬사인회에 응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앨범을 대량 구매한다.
최근 1년 동안 멜론의 월간 차트 최상위권에 오른 곡들을 보면 보이그룹의 곡은 빅뱅의 ‘봄여름가을겨울’ 뿐이다. BTS의 지민과 슈가가 피처링한 태양의 ‘바이브’(VIBE)와 싸이의 ‘댓댓’(That That) 정도가 눈에 띌 뿐 세븐틴과 NCT, 스트레이키즈와 TXT 등 3∼4세대 보이그룹 모두 음원 차트에선 고전했다. 커뮤니티에도 “남자 아이돌 곡들은 쉽게 재생 버튼이 눌러지지 않는다” “본진(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이외 남자 아이돌 노래는 안 듣는다” 등의 글이 다수 올라와 있다.
◇팬덤 의존하며 ‘그들만의 리그’ 된 탓
그렇다면 왜 보이그룹은 대중과 멀어지게 됐을까. 보이그룹의 계보는 H.O.T.와 god로 대표되는 1세대, 동방신기, 빅뱅의 2세대, 엑소와 BTS의 3세대, TXT, 스트레이키즈 등 4세대로 이어져 온다. 보이그룹의 음악이 어려워지며 대중과 멀어지게 된 것은, 3세대로 들어와 힙합 기반의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한 즈음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이때부터 보이그룹의 음악은 멜로디보다는 챈트(구호)에 가까운 후렴구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쉽게 따라부르기 힘든 음악들이 다수 나왔다. 씨스타의 ‘나 혼자’를 만든 작곡가 박현중은 “기획사에서 곡을 수급할 때부터 보이그룹은 멤버들의 퍼포먼스가 부각되는 곡, 멋있어 보이는 곡을 요청한다. 입에 착 붙는 멜로디 라인을 주문하는 걸그룹과 다른 점”이라고 전했다.
이때부터 기획사들의 ‘팬덤 마케팅’도 본격화했다. 보이그룹들이 막강한 팬덤을 기반으로 앨범을 100만 장 이상씩 팔아치우며, 팬덤의 화력을 알아챈 기획사도 본격적으로 대중이 아닌 팬덤을 위한 곡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보이그룹의 콘셉트는 점점 난해해졌고, 팬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복잡한 세계관이 도입됐다. 김작가 평론가는 “팬덤만으로 그룹의 유지가 가능하다 보니 히트곡에 대한 필요성이 없는 거다. 콘셉트만 잘 짜도 가능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국내 대중성은 부족하지만 해외 팬덤이 강력한 보이그룹들이 생기면서, 해외 팬들에게 호응을 얻을 만한 화려한 퍼포먼스 위주의 곡들을 선보이게 됐는데, 스트레이키즈 등이 대표적인 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보이그룹은 팬덤 위주의 소비가 많이 이뤄지고 엄청난 결과를 내다 보니 모든 대중에게 어필하는 유행가보단 팬덤이 만족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게 됐다. 그리고 이것이 보이그룹의 진입장벽을 높였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보이그룹의 히트곡이 나와야 하는 때”라고 입을 모은다. 정민재 평론가는 “보이그룹들이 지금까지 활약한 덕에 해외 팬들을 많이 얻었고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이제 국내에도 신경 써야 하는 시점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가요계 관계자들 역시 대중성을 확보할 만한 히트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싸이도 최근 본인이 키워낸 보이그룹 TNX 멤버들에게 “이제는 조금 더 듣기 편하고 모두가 즐겨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악을 해보자”고 전했다는 후문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컴백을 앞두고 있는 보이그룹들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스트레이키즈와 세븐틴이 다음달 컴백을 앞두고 있고 NCT의 유닛 도재정(도영·재현·정우)이 올 상반기 데뷔한다.
“뉴진스의‘듣는 음악’ K - 팝 새 성공 공식”
■ 전문가 “본질에 충실하라”
지난해 데뷔한 신인 걸그룹 뉴진스의 성과가 놀랍다. ‘디토’(Ditto)는 멜론 주간 차트에서 10주 연속 1위에 올라 멜론의 18년 역사상 최초를 달성했고, 미국 빌보드의 메인 싱글 차트인 ‘핫 100’에도 진입해 6주간 머물렀다. 스포티파이에서는 지금까지 발표한 6곡의 합산 누적 스트리밍 수가 10억 회를 돌파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뉴진스의 성공이 위기에 빠진 보이그룹들에겐 엄청난 힌트가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뉴진스의 사례를 통해 새로운 K-팝 성공 공식을 살펴봤다.
뉴진스의 성공 요인으로는 지금까지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 잡은 많은 것들을 모두 ‘반대’로 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보는 음악’이 아닌 ‘듣는 음악’을 선보인 것, 맥시멀한 음악이 아닌 미니멀한 음악을 추구한 것, 완벽한 모습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을 선보인 것 등이다.
뉴진스의 노래들에는 억지스러운 고음이나 빽빽한 랩이 없다. 마치 1990년대 팝송과 같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기반으로 해 듣기 편하고 따라 부르기 쉽다는 특징이 있다. ‘듣는 음악’이라는 본질에 충실한 것이다. 미국의 대중음악 평론가 존 캐러머니카는 뉴진스의 ‘쿠키’에 대해 “과하거나 극적이지 않다”고 평했는데 이는 지금까지 나온 뉴진스의 모든 노래를 관통하는 특징이다. 보이그룹들의 노래가 높은 진입장벽을 지닌 이유를 “과하다”는 것에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뉴진스의 “과하지 않음”은 보이그룹들에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다는 평가다.
칼군무를 특징으로 하는 화려한 퍼포먼스는 보이그룹들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자 매력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군무는 이상적이다. 하지만 뉴진스의 무대에선 칼군무가 없다. 같은 춤을 각자가 자유롭게 추는데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뉴진스의 데뷔앨범 ‘뉴 진스’(New Jeans)는 제작 과정부터 기존 K-팝 앨범 제작과 순서가 달랐다. 많은 경우 콘셉트 기획이 먼저 이뤄진 후 노래를 수급한다. 하지만 뉴진스는 노래를 먼저 수급한 후 콘셉트 기획과 멤버 구성이 완성됐다. 이 때문에 노래와 콘셉트, 멤버들의 분위기가 유기적으로 구성될 수 있었다.
다만 뉴진스를 바라보는 가요계 관계자들의 시선은 조금 불안하다. 아직 ‘민희진 걸그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는 게 불안 요소다. SM엔터테인먼트의 비주얼 디렉터로 소녀시대와 엑소 등을 성공시킨 후 온전히 자신의 색깔만을 담아 만들어낸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걸그룹이긴 하지만 데뷔한 지 7개월도 넘은 그룹에 아직 제작자의 이름이 따라다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뉴진스가 궁금하지 않고 민 대표가 이다음엔 어떤 음악을 가지고 올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는 것은 문제”라며 “YG, SM 등과는 다른 의미로 뉴진스는 오너 리스크를 가진 그룹”이라고 말했다.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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