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文정부 "日초계기에 추적레이더 쏴라"..사실상 교전 지침
문재인 정부에서 군 당국이 낮은 고도로 근접 비행하는 일본 해상초계기에 대해 현장 지휘관이 추적 레이더를 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침을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2018년 12월~2019년 1월 잇따른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 위협비행에 따른 조치였다. 추적 레이더 조사(照射)는 함포나 미사일 공격 의사를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침은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끊임없이 무단진입하는 중국이나 영공을 침범했던 러시아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공해에서 유독 일본과 교전을 불사할 수 있다는 취지가 된다.
17일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에 따르면 2019년 2월 군 당국은 ‘일 초계기 대응 지침’을 해군에 내려보냈다. 이는 그해 1월 작성한 ‘제3국 항공기 대응 지침’과는 별도의 지침이다.
‘제3국 항공기 대응 지침’은 공해에서 제3국의 항공기가 아군 함정에 다가올 경우 단계적으로 대응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3국 항공기가 1500피트(약 457m) 아래로 내려와 가까이 접근하면 아군 함정은 피아를 식별한 뒤 통신으로 경고하는 등의 4단계 절차에 따라 행동하라고 돼 있다. 1차 경고가 통하지 않으면 더 강경한 내용의 메시지를 2차로 내보내야만 한다.
그런데 ‘일 항공기 대응 지침’은 ‘제3국 항공기 대응 지침’보다 1단계가 더 늘어난 5단계다. 일본 군용기가 2차 경고통신에도 응하지 않고 가까이 날아오면, ‘추적 레이더 조사’로 맞서도록 규정했다. 추적 레이더는 함정에서 함포나 미사일을 겨누려고 표적의 방향, 거리와 고도를 재는 레이더다. 사격통제 레이더라 부르기도 하고, 일본에선 화기관제 레이더로 쓴다.
추적 레이더를 켜서 레이더 빔을 항공기에다 비추는 건 공격할 의사가 있다고 알리는 행위다. 당초 일본 해상초계기 저공 위협비행을 둘러싼 한ㆍ일간 갈등도 추적 레이더에서 비롯됐다.
일본 해상자위대의 P-1 해상초계기가 2018년 12월 20일 독도 동북쪽 160㎞ 해상에서 해군의 3900t급 구축함인 광개토대왕함에 150m 고도에서 500m 거리까지 비행했다. 해상초계기의 속도를 감안하면 당시 고도와 거리는 광개토대왕함에게 위협적이었다는 평가다. 이와 관련 일본 측은 해군 광개토대왕함이 먼저 추적 레이더를 조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 당국의 조사 결과 당시 광개토대왕함의 추적 레이더인 STIR 180은 꺼진 상태였다.
이후 일본은 2019년 1월 3차례나 해군 함정 위로 해상초계기를 보내면서 양국 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문제는 군 당국이 일본 해상초계기를 상대로 ‘추적 레이더 조사’ 단계를 규정한 데 이어 현장 지휘관이 자위권 차원에서 이를 결정하도록 했다는 점이다. ‘신중하게 시행하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자칫 무력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권한을 현장 지휘관에게 위임한 것이다.
김진형 전 합참 전략부장(예비역 해군 소장)은 “일본은 우리와 정치적 갈등은 있었지만, 군사적 충돌까지 이어진 적은 없고 사실상 안보 분야에선 협력하는 나라”라며 “일본이 공격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데 지휘부가 애매한 명령으로 함장에게 군사적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떠넘긴 건 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일 항공기 대응 지침’이 일본을 한국의 군사관할권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중국ㆍ러시아보다 더 강경하게 다루는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군사적으로 더 긴장해야 할 중국ㆍ러시아 군용기에 대한 대응은 일본과는 달리 제3국과 마찬가지로 적극적 경고통신 등 4단계까지가 전부였다.
실제로 최근 한국의 영공을 침범한 건 러시아 군용기였다. 러시아 공군의 A-50 조기경보기는 2019년 7월 23일 오전 9시 1분쯤 독도 영공을 2차례 침범했다. 당시 공군의 F-16 전투기가 기관포로 경고사격을 하면서 러시아 조기경보기를 영공 밖으로 내쫓았다. 러시아 조기경보기의 영공 침범은 러시아의 Tu-95 전략폭격기와 중국 H-6 전략폭격기 연합편대가 KADIZ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전략폭격기는 핵 공격을 할 수 있다.
추적 레이더 조사가 일으킬 수 있는 외교·군사적 폭발성 때문에 2019년 2월 군 당국이 ‘일 항공기 대응 지침’을 만들었을 때 군 내부에선 ‘일본과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라는 비판이 많았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익명의 정부 소식통은 “‘일 항공기 대응 지침’은 청와대 안보실이 주도해 군 당국의 원안보다 더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신원식 의원은 “일본 해상초계기를 특정해서 별도의 지침으로 현장 지휘관에 군사적 대응까지 위임했다는 건 대단히 위험한 정책”이라며 “군사적으로 일본을 예외적으로 우대하는 것도 안 되지만, 특별히 강경한 조치를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국제법 학자인 이기범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가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건 당연하지만 자위권 행사에 앞서 외교적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말했다.
군 당국은 일본 군용기에 강하게 대응하라는 지침을 만들었지만, 정작 일선에선 대치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상호 움직임을 미리 알렸다. 국방부가 신원식 의원실에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한ㆍ일 양국의 군용기가 상대편 군함 쪽으로 비행할 경우 양측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교환했다. 또 한국 군함 인근에 중국ㆍ러시아 군함이 나타날 경우 일본 해상초계기가 식별ㆍ채증을 위해 저고도 비행을 하기에 앞서 한국 측에 미리 알렸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한국과 일본 정치인들이 국내 정치를 의식해 강경 기조로 몰아갈 때도 양국 안보 당국에선 우발적 충돌은 엄청난 후폭풍을 부를 수 있으니 극히 주의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자칫하면 한·일 간 군사 충돌을 부를 수 있어 현장에선 ‘일 항공기 대응 지침’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이와 관련 국방부는 ‘일 항공기 대응 지침’ 파기를 검토 중이라고 신원식 의원실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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