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낯선 사이] '헤어질 결심', 군 위안부, 김건희님의 다운로드

정희진 여성학자 2022. 8. 1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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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 중 해외 연출작 외에는 모두 보았다. <복수는 나의 것>(2002)과 <헤어질 결심>을 가장 좋아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보기 힘들어서 두 번 보지 못했지만 꿈에 나타났으므로 ‘여러 번 봤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헤어질 결심>은 세 번 보았다. 주·조연은 말할 것도 없고 독립영화 <들꽃> 시리즈의 스타 정하담 배우까지 멋진 배우들의 기막힌 연기, 언어의 차이가 작품의 깊이로 전환되는 각본과 연출, 이야기 구조…. 이 영화의 매력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정희진 여성학자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작품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날을 꿈꾸지만,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정치적이지 않은 텍스트는 없다. 이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탕웨이)은 젠더 폭력 피해자다. 그녀가 남편을 죽였다면, 당연히 정당방위다. 남편은 지갑, 가방… 모든 물건에 자기 이름을 새기는 인간이다. 중국 출신 이주여성인 그녀는 8년 동안 의료진도 놀랄 만큼 표시 안 나게, 매일 맞고 살았다. 몸에는 남편의 여느 소지품처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정당방위이므로 영화의 전제인 남편의 사인이 자살이냐 타살이냐는 줄거리는 ‘붕괴’된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문신은 흔하다. 폭력 남편들은 주로 몸의 민감한 부분에 자기 이름이나 욕설을 새긴다. 소유물, 낙인, 노예라는 뜻이다. 정육(精肉) 과정에서 상품에 도장을 찍는 행위와 같지만 문신과 도장은 다르다. 문신은 조각(彫刻)이다. ‘각’에는 칼(刀)이 필요하다. 육체가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의 시술도 아닌 피와 살이 튀는 인체 실험, 폭력이다.

이처럼 박학(薄學)한 지식조차 괴로울 때가 있다. 젠더 폭력으로서 문신. 이 멋진 영화를 나는 온전히 감상할 수 없었다. 관련 기억이 줄줄이 소환된다.

<나는 부정한다>는 홀로코스트 소재 영화로서 최근 출몰하는 역사부정론자들의 실화다. 이들은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며, “있었다”는 증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나이 든 여성이 나치가 새긴 문신을 보이자 역사부정론자는 조롱한다.

젠더 폭력의 증언, 문신

박수남 감독의 <침묵>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운동가로 성장하는 다큐멘터리로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관련 영화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침묵>은 운동 조직 없이 활동하는 피해자들의 자조 모임, 당사자 운동을 다룬다. 이들의 언어는 피해자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 극복한다. 듣는 이가 같은 처지의 동료일 때, 팩트가 드러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침묵한 이들은 피해자가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사회다. 피해자가 아무리 말해도 한·일 양국은 침묵하거나, 그들의 말을 취사선택하여 피해자를 위계화시켰다. <침묵>에도 문신이 나온다. 당시 일본군이 군 위안부의 팔에 이름을 새긴 것이다. 피해자는 고향에 돌아와서 지우려 했으나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자, 이 문신을 역사적 증거로 삼기로 하고 남겨둔다. 매일 아침 세수할 때마다 ‘그 나날’들을 상기하며 몸으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간다.

<헤어질 결심>과 <침묵>의 역사적 맥락과 장르는 완전히 다르지만, 문신이라는 젠더 폭력으로 만난다. <헤어질 결심>에서 형사가 남편의 폭력을 왜 경찰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묻는 장면은 <침묵>에서 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회와 겹친다. 가정폭력을 신고하면 경찰이 도와주는가? 사회는 군 위안부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믿어주었는가?

박수남 감독은 재일교포로 일제강점기에 부모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한 영화감독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서울의 정대협’만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대구, 수원, 광주, 해외에서도 왕성했다.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자이니치 여성들의 군 위안부 운동은 일본사, 한국사의 한 부분이 될 만큼 치열하고 광범위했다. 그들은 일본 우익의 살해 협박을 받아가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버려진’ 군 위안부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했다.

그런 박수남 감독이 1998년, 한국 정부에 의해 입국을 금지당했다. 당시 박수남 감독은 자신의 입국 금지 사실을 한국의 신문 기사를 보고 알았다. 1970년대 재일교포를 간첩으로 조작하던 시절도 아니고, 2000년대를 앞두고 입국 금지라니. 입국 금지령을 ‘내린’ 집단은 한국의 군 위안부 단체였다. 학계에서 매장을 무릅쓴 어느 연구자가 당시 외교부 직원을 끈질기게 추적, 오랜 설득과 인터뷰 끝에 관련 문서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침묵한 사건이다.

박수남 감독과 정대협의 군 위안부에 대한 입장은 같다. “군 위안부는 국가가 조직한 명백한 전시 성폭력이고, 일본 정부는 가해자로서 책임과 관련된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런데 왜 같은 운동을 해 온 동지인 박수남 감독의 입국을 막았을까.

주지하다시피 DJ의 당선은 천운이었다. 이인제씨의 500만표 분산, DJP연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DJP연합의 대표가 왜 김종필이 아니라 김대중이냐고 항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정권 교체는 되었지만 DJ 정부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김대중 정권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건국 이래 최초의 정권 교체, 김대중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지만, 사실은 김대중 정부였기에 가능한 사건이었다. ‘친정부 단체’가 된 일부 사회운동은 오만, 독선, 독점욕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이후 나눔의집의 부정부패와 윤미향 의원의 각종 혐의, 위안부 쉼터 담당자의 자살, 이용수님의 폭로로 이어졌다.

대통령 배우자·여성운동가의 표절

모처럼 ‘박찬욱 월드’에서 행복했던 나는 문신 장면 때문에 마침내 붕괴되었다. 지난 정권은 무엇을 잘못했고, 현 정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영화를 네 번째 보지 못한 이유는 여기서 넘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 지면에서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 했다. 하지만 한국 학계에서 표절이나 다운로드는 대통령 배우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일부 군 위안부 운동가, 연구자들의 표절, 횡령, 성폭력, 인적 네트워크를 기준으로 다른 운동가와 연구자를 배제하고 모욕한 행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윤석열 정권의 탄생은 민주당이 싫어서였지 국민의힘을 지지한 결과가 아니다(누구보다도 현 정권이 가장 잘 알 것이다). 1998년, 24년 전에도 군 위안부 단체가 외교부를 흔들 정도였으니 문재인 정권에서는 어떻겠는가. 군 위안부 이슈는 한국의 경제 성장과 민주화운동 수출이라는 담론 속에서 일부 ‘똑똑한’ 지식인들에게 블루오션이 되었다.

일본 우익의 폭력과는 별개로 세계 곳곳의 소녀상이 대변하듯 운동은 대중화와 동시에 성역화되었다. 실리는 말할 것도 없다. 군 위안부 관련 각종 기금은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고, 주인을 잃은 채 처리 곤란 상태에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자신의 비리를 덮고 각종 자원 확보를 위해, 위안부 사안에 뛰어든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이들의 부패는 현 정권 탄생에 일조했다.

나는 원래 대통령 배우자의 논문 다운로드에 대해 쓰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여성주의자’로서, 김건희 여사보다 더한 사례가 있으니 난감했다. 정의기억연대(이사장 이나영) 일부 관계자의 논문도 지난 15년간 계속 문제가 되어왔기 때문이다. 여성계와 학계는 쉬쉬했다. 입국 금지 같은 보복이 실제로 빈발했다.

특히 정의연의 핵심 모 교수는 최초 학위 논문부터 재판에 버금가는 조사를 받았고 이후에도 모든 논문이 절도 의혹을 받았지만 쉽게 무마되었다.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은 해임, 매장 위협, 학술지 심사위원과 연구비 배제 등 공포에 떨었다.

사회운동이 피해자의 인권 중심이 아니라 조직 자체의 존속과 대의가 강조될 때, 이런 일은 필연적이다.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해 최소한 현 정권에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이라면, 군 위안부 운동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로남불의 반복이다. 위안부 운동의 변화가 검찰에서 시작되지 않기를 절실히 바란다. 그러면 일부 진보 세력은 또다시 피해를 주장할 것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나는 정훈희·송창식씨의 ‘안개’에 의지하며 이 끔찍한 현실에 눈을 감는다.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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