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허준이 교수 "필즈상에 무게감..포기할 줄도 알아야"
"수학자로서 이대로 열심히, 조용히 공부하며 살았으면"
(헬싱키=연합뉴스) 김정은 특파원 = 한국 수학자로는 처음으로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39)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 겸 한국 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의 수상 소감 첫 마디는 '무게감'이었다.
허 교수는 5일(현지시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국제수학연맹(IMU)의 필즈상 시상식에서 수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호명됐다.
허 교수는 연합뉴스와 현지에서 만나 "역대 수상자 명단을 보면 무게감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필즈상 명단에서 1980∼1990년 사이 현대 수학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큰 흐름을 볼 수 있다"며 "특히나 제가 하는 분야인 대수기하학에 큰 공헌을 하신, 저에겐 영웅 같은 분들도 이름이 줄줄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명단 바로 밑에 내 이름이 한 줄 써진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묘한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허 교수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보유했지만, 두 살 때 부모와 함께 서울에 온 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자퇴 후 서울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모두 마친 '토종 한국 수학자'다.
그만큼 이번 수상은 한국 수학계에도 큰 경사다.
허 교수는 "제가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기보다는 최근 한 10∼20년 사이에 한국 수학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IMU는 올해 2월 한국 수학의 국가 등급을 4그룹에서 최고 등급인 5그룹으로 승격을 확정했다. 한국은 1981년 1그룹 국가로 국제수학연맹에 가입한 이후 최단기간에 5그룹으로 승급한 나라가 됐다. 현재 5그룹 국가는 한국과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이스라엘, 일본, 중국, 프랑스 등 12개국이다.
허 교수는 "지난 30∼40년간 최저 등급에서 최고 등급까지 올라간 것은 거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제가 딱히 도드라졌다기보다는 3,40대 젊은 수학자들이 굉장히 잘하고 실력이 좋아 그런 연구 성과들이 등급 상향 결정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수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안은 그는 뜻밖에 '포기할 줄도 아는 자세'를 언급했다.
수학에서 소위 난제라고 하는 것들은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수학할 때 자신에게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라고 되뇌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인류 전체로서 아직 그런 종류의 현상을 이해할 준비가 안 된 것도 있고, 혹은 내가 개인 연구자로서 그 문제를 연구하고 이해하기에 준비가 안 된 때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준비가 안 됐을 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을 이를 악물고 해서 5년 이내에 풀어내겠어'라고 한다면 공부하는 과정이 굉장히 고통스럽다며 "문제를 하나를 정해두고 집착하면 마음도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발상이 너무 경직된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계속 열심히 안 하는 것은 힘들겠지만, 포기할 때는 놔줄 줄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가끔 놔주는 시기가 있으면 계속 새로운 방식으로 실패하면서 자기가 시도하고 탐험해보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원래 목표가 아니더라도 뭔가 새롭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필즈상은 이전까지 총 60명이 수상했다. 미국과 프랑스 출신자가 많고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인이 3명, 중국계 미국인 1명, 베트남계 프랑스인 1명 등이 받았다.
한국 수학자의 첫 수상에 대해 그는 "우리나라는 전후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는데 학문이 체계적으로 발전하려면 안정된 대학과 정부의 지원과 여러 조건이 갖춰져 야 한다"며 "그런 조건이 갖춰지기 시작한 게 비교적 최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가 늦기는 했지만 조건 면에서 이제 다 동일선상에 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한국 수학계가 계속 발전해나가려면 연구자가 마음 편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춰져야 한다면서 장기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자신의 연구법에 대해 "목표를 딱 정하고 일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며 "보통 새로운 구조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이론을 개발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렇게 이론의 꼴이 잘 갖춰지면 그 렌즈로 그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중에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지를 본다"며 "일단 도구를 미리 만들고 이것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문제를 나중에 보는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최근엔 대부분 공동 연구를 한다고 했다.
"집단지성이라는 게 무서워서 한 사람이 막히더라도 '내가 이러이러한 이유에서 막혔어. 나는 더는 여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겠어'라고 옆 사람에게 설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옆 사람이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구성원 중에 어느 한 명이 굉장히 뛰어나서가 아니라 완전히 똑같은 얘기를 그냥 서로에게 들려줬다가 되돌려받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굉장히 신비하게도 원래는 없는 정보량이 굉장히 불어나 어느 순간에 새로운 정보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순수수학은 본질적으로 놀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지적 유희를 재미있어한다는 게 인간의 굉장히 고유한 특성인 것 같다"고 말했다.
수학자로서 지금이 좋다면서 "이대로 조용히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필즈상 메달 앞면에는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얼굴과 함께 라틴어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움켜쥐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허 교수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며 "어려운 수학 문제를 처음 마주했을 땐 절대 내가 못 할 것 같은 일들이 이뤄진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에 중요한 발상을 얻어냈을 때는 내 한계를 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kj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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