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부름을 완수하고 '긍지'를 얻는 아이들..그 성장의 기회를 '안전하게' 주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김유진 2022. 6. 2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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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심부름 가는 길
<이슬이의 첫 심부름>에서 아이는 생애 첫 우유 심부름을 한다. 한림출판사 제공
어린이 혼자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는 위험한 길이 심부름까지 빼앗아 가
어린이들은 ‘무한도전’에 가까운 심부름을 완수하기 위해 정말로 눈물겹도록 온 힘을 다한다
“혼자 해냈어”…그러고선 부모를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용기와 자신감
어린이의 공간을 만드는 건 어른이다. 안전한 출발선에 설 수 있을 때 어린이는 성장한다
어린이의 긍지에 기회를 주자

일곱 살이 되면서 ‘국민학교’에 입학했으니 유치원에 다닌 건 만 다섯 살 때였다. 다섯 살 어린이가 집에서 유치원까지 500m 남짓한 거리를 매일같이 혼자 걸어가고, 걸어왔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도심부였고, 횡단보도가 네 개였고, 신호등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신호등 없이 건너야 했던 도로 중에는 버스 노선도 있었다. 인구 10만명가량의 소도시이고 차량이 적었다 해도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된다. 다섯 살 어린이가 어떻게 그 길을 안전하게 오갔을까. 자녀를 방임하는 법이 없던 부모님은 어떻게 안심하고 보낼 수 있었을까.

다섯 살인 내가 횡단보도를 네 번씩 건너는 모습을 연상해보다 깨달았다. 아, 그 길에서 나는 수많은 운전자의 보호를 받았겠구나. 횡단보도 대기선에 종종거리며 서 있는 어린 나를 보고 멈춰 섰을 어른들이 문득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내가 손을 높이 들고 길을 다 건널 때까지 자동차들이 감싸주며 보호하는 듯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부모가 된 나는 아이들이 혼자 길을 건너기까지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아파트 단지 앞 2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만 건너면 초등학교까지 갈 수 있는데도 안심되지 않았다. 하교 시간이 다가오면 불안했고 집에 도착했다는 아이의 연락을 받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더 조심스러웠다. 아이의 시야를 가리지 않는 투명 비닐우산이 안전할지, 운전자 눈에 잘 띄는 노란 우산이 안전할지 고민스러웠다. 유독 자녀의 안전을 두고서는 강박증처럼 번지는 마음이 낯설고 힘들면서도 별 도리가 없었다. 횡단보도 근처 불법 주정차된 차들 옆에서 어린이의 작은 몸은 굳이 숨지 않아도 보이지 않았다. 어른인 나의 시선을 되짚어보자니 어른 눈에 어린이는 너무 미약하게 들어왔고, 내 아이 입장이 되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보는 세계는 너무 위험했다. 그 격차가 걱정을 만들었다.

양육자는 얼마쯤 어린이의 눈높이를 얻게 되고, 어른이자 때로 어린이인 두 겹의 시선을 가져서일까.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의 등하교를 보호자가 함께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느낌이다. 예전에는 봄날 한철 풍경이었는데 요즘은 교문 앞에서 어린이를 기다리는 보호자의 행렬이 일 년 내내 계속된다. 갈수록 더 많은 보호자가, 더 오랜 기간 어린이의 등하교를 직접 지킨다.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교통안전 강화대책’이 시행되면서 드디어 집 앞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생겼다. 이제라도 어린이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으면 좋으련만 법 개정을 못마땅해하며 어린이를 탓하는 어른들이 있는 한 신호등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 상황이다.

넷플릭스에서 잔잔한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리얼리티 쇼 <나의 첫 심부름>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조마조마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출연자인 다섯 살 미만 어린이들의 첫 심부름 길에는 제작진이 동행했으니 안전만큼은 보장된다. 교통안전은 물론 범죄 위험에서 보호되니 부모는 심부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다. 그에 비해 우리의 동네는 과연 몇 살 어린이가 첫 심부름에 나서도 충분히 안전한 환경이 될까. 초등학교 1학년이 다 지나도록 매일 가는 학교도 혼자 보내지 못하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어린이에게는 심부름이 점점 사라지는 듯 보인다. 어린이 혼자 마음 놓고 다니기에 너무 위험한 길이 심부름까지 빼앗아갔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 쓰쓰이 요리코 글·하야시 아키코 그림·한림출판사 | 1991

심부름을 통해 도전과 응전을 감당하다

심부름을 소재로 하는 책 역시 요즘보다는 예전 그림책이나 동화에서 더 많아 보인다. 그림책 <이슬이의 첫 심부름>(쓰쓰이 요리코 글·하야시 아키코 그림·한림출판사·1991)은 <나의 첫 심부름>이란 프로그램 제목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오래되고 유명한 ‘심부름 책’이다. 아기 침대에서 우는 동생을 달랠 새도 없이 식사 준비에 분주한 엄마가 이슬이를 부른다. “이슬아, 너 혼자 심부름 다녀올 수 있겠니?” “우유가 있어야겠는데, 엄마가 너무 바쁘구나. 네가 심부름 좀 다녀오렴.” 지금껏 혼자 밖에 나가본 적 없던 이슬이는 엄마의 주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장 “나도 이제 다섯 살인 걸”이라고 대답하며 집을 나선다.

‘나도 이제 다섯 살’이니 심부름을 다녀오겠다는 결심에는 다섯 살 정도면 할 수 있겠다는 예측과, 다섯 살 정도면 그쯤은 해야 하겠다는 수락이 담겨 있다. 어른이 새로운 과업을 두고 자기 역량을 가늠해보듯 어린이도 끊임없이 ‘도전과 응전’을 감당한다. 한 해가 다르고, 한 달만도 달라지는 어린이 존재의 특성상 어린이의 도전은 정말로 ‘무한도전’에 가깝다. 갓 태어나 목을 가누고, 뒤집기를 하고, 기어 다니다가, 걷는다. 양육자가 눈앞에서 잠시만 사라져도 하늘이 무너져 하다가, 혼자 밖을 나선다. 세발자전거를 굴리다, 네발자전거를 거쳐 두발자전거를 탄다. 매 순간 도전과 모험인 어린이의 일상이 만약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첫 심부름은 혼자 집 밖으로 나서 오로지 혼자 힘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엄청난 모험이다. 다섯 살 이슬이는 이를 선뜻 감행했지만 도전부터 쉬운 일은 아닌 게 당연하다. <나의 첫 심부름>에 출연한 어린이들은 종종 심부름을 나서길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엄마가 없으면 울 거다”라고 외치며 엉엉 울어버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오빠 손을 잡고 가까스로 집을 나섰으면서도 결국 뒤돌아 달려가 엄마에게 안긴다. 심부름에 대해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반복하며 도전을 지연시킨다. 잔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야 했을 거다.

일단 집을 나서는 데 성공했어도 집 밖에는 예상치 못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이슬이의 첫 심부름>에서 이슬이는 멀리서 빠르게 다가오는 자전거를 보고 벽에 바싹 붙어 선다. 언덕길에서 넘어지면서 손에 쥔 동전 두 개가 굴러가버리자 아파할 새도 없이 얼른 일어나 동전을 찾는다. 겨우 도착한 가게에서 “우유 주세요!”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나와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온 어른 손님들이 먼저 물건을 사 가버린다. <나의 첫 심부름>에도 어른들의 세계에서 어린이가 겪는 난관이 드러난다. 1m도 안 되는 작은 키로는 자판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계산대 위에 동전을 올려놓지도 못한다. 심부름에 성공해 획득한 물건은 소중한 마음 그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늘 땅에 끌려 다닌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은 심부름을 완수하기 위해 정말로 눈물겹도록 온 힘을 다한다. “엄마가 부탁했어” “할 수 있다” “해낼 수 있어”라고 소리 내어 말하며, 어른이 자기 개발서로 배우는 자기 암시까지 실행하면서 목표 달성에 노력한다. 밭에서 자라는 양배추를 단번에 뽑을 힘은 없지만 얼굴만 한 양배추를 부여잡고 30분 넘게 빙글빙글 돌려 결국 뽑아내는 지혜와 집념을 발휘한다. 심부름 가는 길에서 자꾸만 곁눈질할 일들이 유혹하지만 “다른 거 할 때가 아니야”라며 미션에 집중한다.

넉 점 반 윤석중 시·이영경 그림·창비 | 2004

그럼에도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경험에 열려 있는 마음은 어쩔 수 없어서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종종 어둑해지기 마련이다. 윤석중의 동시를 그림책으로 만든 <넉 점 반>(윤석중 시·이영경 그림·창비·2004)에는 심부름 길에 나선 어린이의 시선과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 윤석중, ‘넉 점 반’ 전문

(점(點)은 시간을 나타내던 단어로 넉 점 반은 네 시 반이라는 뜻)

공간이 안전해질수록 모험의 기회는 늘어난다

이 동시가 발표된 1940년이나 지금이나 어린이는 한결같은 데가 있다. 그러니 지금껏 여러 ‘심부름 책’이 비춰온 어린이를 리얼리티 쇼 <나의 첫 심부름>에서는 단번에 만난다. 여기에서 어린이를 가로막는 문제 상황이 번번이 발생하고, 그 문제를 어린이가 해결하는 과정을 여러 번 마주하다 보면 어른이 어린이에게 제공해야 할 환경에 대한 고민에 이른다. 물론 리얼리티 쇼의 공간을 통제하는 제작진처럼, 해 질 녘에야 심부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이의 어둑한 밤길을 매번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밝혀줄 수는 없다. 어린이 역시 오직 스스로 감당해야 할 순간이나 몫이 있다. 어린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른의 보호 아래 두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성장을 방해한다. 하지만 어른은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는 어린이가 있을 때 운행을 정지할 수는 있다. 심부름 나온 어린이가 요청한 물건을 찾아준 뒤 “다른 건 부탁받은 거 없어?”라고 물어보며 기억을 도와줄 수도 있다.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권정생 지음·창비 | 2002

그런 도움으로 첫 심부름에 성공한 어린이들은 “내가 해냈어” “나 혼자 해냈어” “나 천재 같아”라고 뿌듯해하며 자신감을 지닌다. 심부름을 완수하고 나서 “이제 안아달라고 안 해요”라고 엄마에게 선언하는 용기를 얻는다. 권정생의 동화 <또야 너구리의 심부름>(창비·2002)에서 콩나물 값으로 1000원, 간식 값으로 100원을 주는 엄마에게 또야는 몇 번씩이나 확인한다. “이 돈 백 원 진짜 그냥 주는 거지?” “심부름하는 값 아니지?”(<또야 너구리의 심부름> 20~21쪽) 작가는 “엄마가 시키는 일에 어떻게 값을 받겠어요”라고 말할 뿐이지만 내게는 심부름 대가를 원하지 않는 또야의 태도가 긍지로 보인다. <나의 첫 심부름>의 어린이들에게서도 ‘지금껏 내가 가족의 돌봄을 받았듯 가족에게 내가 필요할 때 기꺼이 돕겠다’ 하는 마음을 여러 번 보았다. 부모가 시키는 일에 대한 순응을 넘어 부모를 돕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긍지.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 에런 프리시 글·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사계절 | 2013

심부름 이야기로는 <빨간 모자>를 빼놓을 수 없다. 옛이야기 <빨간 모자>를 다시 쓴 많은 그림책 중에서도 유명한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에런 프리시 글·로베르토 인노첸티 그림·사계절·2013)는 옛이야기 속 늑대가 사는 숲을 재해석해 아동 성폭력의 현실로 그려낸다. 옛이야기가 대개 그렇듯 <빨간 모자>도 오늘날 어린이의 이야기다. 다만 이야기의 끝을 현실에서 만드는 방향은 어른에게 달렸다. 늑대가 사는 숲으로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지, 사냥꾼이 되어 숲을 지킬지.

어린이의 공간을 만드는 건 어른이다. 어른이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어린이를 돌보고 지키는 공간이 넓어지는 만큼 어린이의 공간이 넓어진다. 그 공간이 세심해지는 만큼 어린이는 안전해진다. 안전한 모험은 없지만 어린이의 공간이 안전할수록 모험의 기회가 늘어난다. 좁디좁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안전한 출발선에 설 수 있을 때 어린이는 자란다. 어린이의 긍지에 기회를 주자.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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